김나령 | 2006/09/25 11:02

김은현 작가의 작품은 반쯤 슬쩍 감은 눈하며 깨달음의 상징인 나발(螺髮)까지 부처를 닮았다. 게다가 알 듯 모르듯 짓고 있는 그 미소는 어떤가. 한 점 점토로 무심히 빚은 그의 작품을 보면 그 옛날, 부처가 대중을 향해 연꽃을 보이자 그 뜻을 알고 가만 미소를 짓던 가섭의 염화미소가 떠오른다. 부처가 있었다면, 보살이 있었다면 꼭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

주목받는 젊은 작가 김은현 씨. 그는 본격적으로 개인전을 시작한 90년대 중반부터 십여년 째 ‘휴식’‘명상’‘기쁨’ 등의 제목을 단 아담한 크기의 도조(陶彫)상을 선봬고 있다.
작품들은 가만 미소짓고 있는 두상이 대부분이다. 미소는 깨달음의 상징인 듯 고매하기도 하고 누이의 미소인 듯 친근하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가만 들여다보면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김은현 씨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익숙한 편안함을 준다. 그리고 도저한 사유와 명상의 세계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지난 19일,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2006화랑미술제에 인사동 이화익갤러리 대표로 참석한 김은현 씨를 만났다. 이번 전시회에서 김씨는 〈연Ⅱ〉 등 아끼는 3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산청토로 만든 작품〈연Ⅱ〉은 보름달처럼 환한 누이 얼굴 같다. 초승달 눈썹과 작은 코, 방긋 웃는 입 모양새가 곱다랗다.

그는 흙을 가지고 주물거리며 두상을 만든다. 우선 흙 한 덩어리를 마음껏 만지며 질퍽하고 푸근한 흙의 속성을 느낀다. 흙은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이자 모든 만물이 스러지는 회향처다. 내재된 무한한 생명력과 모성을 느끼며 흙과 하나가 된 후에야 비로소 롤에 올려놓고 얼굴을 빚는다.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흙을 내려보면 어느새 그 안에는 내 얼굴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도, 부처의 얼굴도 다 들어있다.

“재료의 속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표현하려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흙을 충분히 사랑해야하고 그것과 합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심(私心)을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생각도 뭔가가 되리라는 생각도 내려놓습니다. 그렇게 비우고 한 덩이 흙과 합일이 돼 작업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두상의 표정이 슬쩍 보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들면 인위적이 되기 쉽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머리로 구상하고 빚어내다 보면 예쁜 얼굴만 만들어내기 쉽다는 것이다.

김씨는 일부러 분청토·산청토·옹기토·황토 같은 향토적 소재의 흙을 사용한다. 그리고 유약도 바르지 않고 굽는다. 그렇게 구워낸 도조는 투박하면서도 감칠맛이 난다.

그가 이렇게 선적인 도조상을 빚어내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다. 김은현 씨는 대학시절부터 명상에 심취했다.
“예술을 하다보니 ‘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화두처럼 품고 있었습니다.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다 보니 어느새 인간의 본성과 진리, 그리고 불교와 만나게 되더군요. 명상은 그런 제 목마름을 해소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요가명상동아리에서 명상을 접하곤 그 매력에 푹 빠져 살았다. 동아리에서 지금 남편도 만났다. 남편 박석 씨는 상명대 중문과 교수로 《명상 길라잡이》를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 부부는 명상을 하며 도반처럼 친구처럼 산다.

김은현 씨는 정기적으로 사찰을 찾는 것은 아니지만 법당에 앉아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따로 불교를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관(觀)하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한 것 같다. 힘든 일이 있거나 작품이 잘 되지 않을 때는 조계사 대웅전 법당에 앉아 불상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리고 ‘괴롭습니다’하고 고하고는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내려놓는다. 그렇게 몇 시간쯤 앉아 있다보면 머리도 맑아지고 마음도 편해진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큰아들을 위해서는 매일 《금강경》을 독송한다.

요즘 김은현씨의 일상은 매우 분주하다. 살림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시간을 쪼개 틈틈히 작품을 한다.
올해부터는 1주일에 한번씩 경인교대에 강의도 나간다. 작품을 하면서 틈틈이 세계적 옥션 회사인 크리스티에 작품을 출품해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화려하고 거대한 세계 미술시장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소박한 작품이 고가로 팔려나간다니 놀랄만하다. 하지만 고졸미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질 일이다. 그만큼 김은현 씨의 작품은 한국의 고전미를 표현하면서도 국가·세대·종교를 넘어선 인류의 보편적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다.

그는 앞으로 두상에서 흉상으로 작품세계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또 내년 4월에 열리는 여주 도자기박람회 초대작가로 선정된 만큼, 다양한 기법과 재료를 사용해 많은 작품을 조성해볼 계획이다.

나중에는 경주에 내려가 석굴암 본존불을 매일 보며 살고 싶다는 김은현 씨. 석굴암은 종교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합일된 최고의 완성품이라는 것이 김씨의 지론이다.
그가 석굴암 본존불에 버금가는 부처의 얼굴을 빚어낼 수 있길 기대해본다.
김나령 기자 nrkim@jubul.co.kr

김 은 현(1963~)
·1986 서울대학교 조소과 졸업
·1996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졸업
·1997 현대공간회전(서우 일민미술관)
·2005 서울 이화익갤러리 개인전
·2006 한국 국제아트페어(코엑스)
·現 인천교대 미술강사
·서울조각회, 현대공간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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