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훈 | 2007/01/22 16:34

매력적 주인공 4대 걸친 궁중연애담 흥미진진

일본 규슈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겐지모노가타리 源氏物語' 삽화 중에서

일본이 자랑하는 세계적 고전 《겐지이야기,源氏物語》가 국내 최초로 전 10권으로 완역 출간돼 화제다.
《겐지이야기》는 일본 헤이안 시대의 궁녀이자 여류작가인 무라사키 시키부(978∼1016)가 지은 것으로, 황자(皇子)이면서 수려한 용모와 재능을 겸비한 히카루 겐지의 일생과 그를 둘러싼 일족들의 생애를 풀어낸 일본 문학사상 최초의 장편소설로 평가되고 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생전 “겐지이야기에 비하면 내 작품들은 너무나 볼품 없다”고 했을 만큼 특유의 탐미적 리얼리즘으로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겐지이야기》가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전으로 거듭난 데는 무엇보다 4대에 걸친 궁중연애담이 선사하는 극적 재미와 함께 ‘빛나는 님’이라는 뜻을 가진 주인공 겐지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캐릭터의 힘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원저자 무라카미 시키부는 궁녀 신분에도 불구하고 문학에 조예가 깊어 왕실로부터 특별 개인실이 주어지고 강력한 후원 아래 《겐지이야기》의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당시의 시대적 풍조는 작품 전반에도 고스란히 반영돼 배경묘사 및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시구 등에 일본적인 미학의 정수들로 흘러 넘친다.
당대 최고의 인기 연재소설이자, 등장인물 수 만해도 4백 30여명, 현대의 2백자 원고지 분량으로 8천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이기에 학계 일부에서는 시키부 외에도 공동저자가 있었으리라 추정할 정도다.
《겐지이야기》는 일본 내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재번역되기로 유명한 작품이다. 당대의 고어를 현대어로 바꾸고 문맥의 뉘앙스를 현대적으로 조정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중 일본 내에서도 초유의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누린 번역본은 단연 세토우치 자쿠초(1922∼)의 것이다.

한길사에서 이번에 출간한 《겐지이야기》 완역본은 바로 이 세토우치 자쿠초의 번역본을 국내어로 번역한 것이다. 국내 번역에는 일본 현대문학을 제대로 알리는 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베테랑 번역가 김난주 씨가 맡았다.
또한 전문적인 감수를 위해 일본 도쿄대학에서 일본문화연구 등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김유천 상명대학교 일본어문학과 조교수의 감수를 거쳤다.
다수의 일본 고전들이 그렇듯 《겐지이야기》에도 불교의 영향이 곳곳에 직접적으로 배어있다. 미술·시·복식 등 일본 전통문화 전반을 관통하는 불교의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불자로서 《석가모니》 《사랑과 구원의 관음경》 등의 수많은 불교저서를 발표한 역자 세토우치 자쿠초의 영향 때문에라도 이 작품은 비록 황실을 배경으로 한 치정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교적이라는 수식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주인공 히카루 겐지를 현대적 표현으로 수식하자면 아마 일본판 카사노바 쯤이 적당할 것이다. 그는 황실의 여자들(심지어 자신의 양어머니까지)은 물론 다양한 계층의, 연령대도 제각각인 여자들을 섭렵하며 사랑을, 혹은 정념을 불태우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열흘 넘게 붉지 않다)이랬던가. 여자보다 아름답고 요염한 매력을 뽐내며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했던 그도 죽음과 소멸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행원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비록 이 책이 쓰여진 당시의 가치관으로서는 다소 난잡한 인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지만, 주인공 겐지의 독특하면서도 진정성 넘치는 ‘사랑법’ 만큼은 비관습적인 행위와는 별개로 ‘예술적 영원성’을 획득했다.
즉, 자신을 거쳐간 여성들에게서 단순히 육체적 쾌락만 좇는 게 아니라, 진심 어린 사랑의 감정으로 대했던 겐지의 모습은 특히 고래를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리라.
사랑의 다양한 기술에 능통한, 치명적 옴므파탈(Homme-Fatal) 히카루 겐지를 통해 올 겨울 독자들은 신열처럼 번지는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한길사 / 각 권 1만 2천원.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925호 1월 24일자

Copyright ⓒ 주간불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