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현 | 2007/01/29 13:11

다선·바둑 흥치 젖으면 찻잔에 어리는 풍류

물질 문명의 한계로 정신문명에 대한 관심이 극대화 되고 있는 요즘 세간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는 곳이 있어 찾아가 봤다. 선․차․시가 하나로 통한다는 수종사(水鐘寺) 내 삼정헌(三鼎軒)이 바로 그곳.

삼정헌에 가기 전날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작품 '안녕 나의 집'을 봤다. 그는 아트 무비의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자주 비견된다. 두 거장 모두 러시아인이며 느림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삶의 페러다임 자체가 속도와 일여한 지금, 이 두 감독이 어느 때보다 값지게 다가오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가 정신문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혼돈'으로 축약할 수 있다. 데리다의 산종을 흔히 선불교의 불립문자, 교외별전과 비교한다. 강줄기가 결국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서구 철학이 불교의 도랑에 괴는 이유는 존재를 배제한 물질만능주의 때문이다. 사상누각이다.

오타르 이오셀리아니의 작품 '안녕, 나의 집'을 보면서 타르코프스키의 물이 상징하는 '정'의 '은유'와 다르면서도 같은 '동'의 '환유'를 보았다. 선사상이 인도의 명상법인 요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안정'과 '긴장'을 통해 번뇌와 망념을 사하고 불성을 깨닫는 선수행은 두 거장의 영화들이 보여준 영상언어와 무척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느림의 미학이 각광받는 현실․선․타르코르스키 영화의 물은 다선일미(茶禪一味)를 표방하는 삼정헌과 뜻을 함께 한다


마을버스는 청평호를 따라 가다 양평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수종사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을 때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처럼 차향이 입안 가득 번지는 듯 했다. 산은 만 길이나 솟아 있었고 뭇 강물은 모였다가 세 갈래로 나뉘어 졌다. 청평호 수면에 수놓인 햇비늘은 부처님 가피처럼 눈부셨다.

미당 서정주 시인이 바라보던 무등산의 청고함이 저랬을까. 수종사 입구에서 바라본 산의 능선은 청산이 무릎 앞에 지란을 기르는 듯, 지란에 맺힌 이슬 속에 청산이 담겨있는 듯 결결이 포개져 있었다. 일즉다다즉일(一卽多多卽一)의 현현이었다. 법신불이 슴배이지 않은 곳이 있을까.

눈으로 법을 듣는 듯한 산행은 계속됐다. 겨울바람이 훑고 간 산사는 맨발로 뛰노는 아이의 발바닥처럼 누랬다. 어린이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고 했던가. 동자승의 얼굴에 활짝 핀 인꽃처럼 솔잎이 벙글어 있었다.

자연이 헌사한 조화로움은 바른 견해를 길러준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산길을 걷다보면 정로와 오로를 바르게 분간할 수 있는 정사(正思)를 기를 수 있다. 새소리·강물소리·때 이른 소소리 바람은 구업에 귀와 입이 먼 사바세계의 중생에게 정어(正語)를 들려준다. 가파른 산허리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는 나무, 땅이 아닌 부처님께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 모습이 처염하기까지 했다.

수종사 입구에 미륵부처님은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1458년 세조가 금강산에 다녀오다 밤이 깊어 잠을 청했을 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종소리에 눈을 떴다 한다. 알고 보니 물방울 소리였고 그 소리가 종소리와 닮았다 하여 수종사라 기명했다. 수종사는 이상하게도 어느 절에나 있는 해탈문이나 일주문은 보이지 않았다. 불이문만이 참배객의 내방을 반겼다.

수종사는 크지 않다. 가난한 부부의 세간처럼 산신각·대웅보전·종루·석탑 등 꼭 필요한 것들만으로 경내가 구성돼 있었다. 부처님의 눈썹처럼 작고 긴 도량이었다. 서거정이 감탄하고 갔다는 동방가람 제일의 경치가 한눈에 펼쳐 들어왔다.

매양 한강을 주시하는 건 다름 아닌 범종이었다. 그 옛날 세조를 깨운 물방울 소리의 모양새가 저랬을까. 투망으로 그물질하듯 시선을 멀리 던졌다. 높고 낮은 산봉들이 낚여 들었다. 한강으로 합류하는 북한강의 은빛 물결은 눈부시게 밝았다.

수종사는 전경이 빼어나다. 예부터 문필가들은 이곳에서 많은 시를 지었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발 디딜 곳조차 없어 겁을 먹다가(初驚足難著)/ 걸림 없는 시계에 마음 설레네(稍喜眼無遮)/ 기운도 상쾌하다 하늘 가까워(氣爽知天近)/ 산 평평해 인간 세상 먼 줄 알겠네(山平覺地余)/ 맑은 강은 너븐 들을 감돌아들고(晴州回曠野)/ 지는 해는 긴 모래톱 숨어들었다(斜日隱長沙)/ 문원의 목마름을 씻어내리고(一洗文園渴)/ 스님네 늦은 차를 내어 오누나 (多僧進晩茶)

위 시를 쓴 최경창(1539~1583)은 조선 시대의 뛰어난 시인으로서 백광운·이달과 함께 삼당파라 일컬어졌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불성과 불사다. 지금 봐도 지은이의 시심이 읽힌다. 초의선사를 비롯한 다산 정약용·추사 김정희 등이 이곳에서 차를 마셨다.

물맛 좋기로 유명한 약사전 앞 석간수로 달인 차는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삼정헌의 문을 열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참배객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삼정헌은 선·시·차가 하나 되는 다실이라는 뜻이다.

다실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서자 개량 한복을 입은 후덕한 외모의 여자가 분주하게 오가며 참배객들에게 다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곳이 앉아 다기에 물을 부으며 말했다.
“선수행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다도를 통해 차의 진미를 맛보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차분한 가운데 참선을 하거나 차를 마시는 것은 바쁘고 치열한 현대 생활 속에서 참나를 찾는 길입니다.” 그녀의 눈은 밖을 향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마음을 주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은 다·선·시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로 익히 알려져 있지만 주지인 동산스님은 삼정헌을 만들 때 다·선·바둑이 하나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삼정헌이라고 지으셨죠”라고 말했다.

불교와 다도의 공통점에 관한 질문에 그녀는“차를 끓여 마시는 것과 참선하는 것은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속세의 망상을 떨치고 자아의 집착을 버리는 것이 禪이라면 이 또한 茶와 뜻을 함께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주지스님인 동산스님은 불교계의 바둑 고수이기도 하다. 선이 이심전심을 강조하듯 바둑은 마음을 주고 받는 도. 시·바둑·차·선은 마음으로 귀향하는 본래성불은 아닐까. 윤소암의 시 끽다거를 읊조렸다.

‘여보게 벗/ 차 한 잔 마시게/ 그대 바쁜 마음/ 잠시 접어두고/ 이리와 앉으세 그려’
차를 마시는 일은 마음을 닦는 일. 햇빛 잘 드는 다실에서 차 한잔을 음미하다 보니 ‘선다일미’의 가르침이 가슴에 여울졌다.

경기도 양평 수종사=최승현 기자 trollss@jub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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