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오 | 2007/03/12 11:25

40여년 외길… 서예 배워 예술로 승화
“나를 키운 건 ‘9할의 佛心’입니다”

필기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컴퓨터로 인장을 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천편일륜적인 서체의 컴퓨터 인장은 막 찍어낸 통조림의 바코드처럼 기계적으로 느껴지기만 한다.
사람은 이름대로 인생을 산다고 하여 예전에는 작명을 할 때 사주와 오행을 봤다. 표의문자인 한자문화권에서는 사람의 이름만큼이나 중요시했던 것이 바로 인장(印章) 문화이다.
인장이라 함은 나무나 돌 위에 이름을 새기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운명을 새기는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인장문화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연재 류철규(烟齋 柳鐵圭) 명장을 만나 그가 걸어온 길과 장인정신에 대해 들어봤다. 〈편집자주〉

대전시 중구 선화동에 소재한 성호사를 찾았을 때 그는 당일 인장작업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그는 주문이 아무리 많아도 하루 2개 이상 인장작업을 않는다.

또한, 촉박하게 날짜를 못 박는 작업은 일체 정중히 거절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작업밀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도의 정신력과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인 만큼 하나를 만들더라도 최고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장인만이 가질 수 있는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오전에만 인장작업을 하고, 오후에는 서예·서각·전각 등 작품활동에 몰두한다. 해가 떨어지면 후배양성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

장인정신의 산물인 그의 인장은 하나의 예술 작품로 평가 받기 때문에 고가의 경우 몇 백 만원을 호가한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정치인·법조인·경제인·문화인들이 그의 고객들이다. 그가 인장문화의 대가가 된 데는 그만큼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한 직후 부친이 작고하면서 인장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형제 중 장남이었던 그는 가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에게 인장 일을 권유한 것은 동네 어른들이었다. 필적이 좋으니까 인장 일을 하면 대성할 것이라고 동네 어른들이 말했던 것. 그가 대전으로 올라온 것은 열일곱 살. 이석성 선생으로부터 8년간 사사를 받았다.

당시에는 어깨 너머로 인장을 배워야 했던 지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낮에는 조각칼을 갈고, 밤에는 스승의 인장을 그대로 새겨보는 것을 몇 년을 거듭해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의 성실함을 눈 여겨 본 스승이 그에게 “인장만 파서는 기술자에 머무르니까 한학을 배우라”고 당부했다. 그가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8년간 좌서(글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법)와 5체(전·예·해·행·초)를 도장목에 글씨를 거꾸로 새기는 수련을 거듭했다.

일취월장(日就月將)하는 그에게 스승이 자신의 스승인 박인규 선생을 소개했다. 2년간 박인규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은 후 그는 자신의 작업장인 성호사 간판을 걸게 됐다. 30대에 성호사를 열었으니 일찌감치 일가를 이룬 셈이다.

시대가 그를 필요로 했던지 한동안 그는 밤낮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가 성호사를 열었을 때에는 모든 서류에 날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요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사인문화가 확산되면서 인장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실제로 인장업 회원만 해도 7백여 명에 달했던 대전·충남지부는 현재 고작 몇 십 명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시류에도 그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은 스승의 당부에 따라 서예와 전각(篆刻:돌·나무·뼈에 글과 그림을 새기는 것)과 서각(나무 판에 글자를 새기는 것)을 익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부단한 자기노력으로 기술자에서 예술가로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는 1994년부터 응모해서 꾸준히 입·특선한 끝에 서예 최대작가가 됐다.

류철규 명장이 반야심경을 새긴 나무뿌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인장과 전각·서각이 남다른 이유는 우선 서체이다. 그는 자신만의 서체를 개발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그 결과 전 세계에 유일한 ‘류철규 서체’를 만들었다. 그의 인장이 고가인 것도 위조가 불가능한 그만의 서체 때문이다.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은 ‘9할의 불심(佛心)’이었다. 그는 갑사 대원암(주지 경식)에 다니면서 불심이 깊어졌다. 그가 불교에 귀의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우선 독실한 불자였던 어머니 영향도 컸지만, 아내의 병환이 그를 사찰로 인도했던 것이다.

아내가 뇌종양과 경추종양 진단을 받고 몸져누우면서 그는 마음의 의지처를 찾아야 했고, 사찰이 그의 힘든 마음을 푸근히 감싸안아줬다고 한다.

그는 아내를 치유하기 위해 강원도 백담사에서 여수 향일암까지 전국을 순례했다. 사찰의 지기를 받기 위해서였다. 사찰에 나가면서 경전공부도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자연히 불교작품도 제작하게 됐다.

반야심경을 나무뿌리나 돌에 새기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지난 2006년에는 갑사 대원암 부처님에 복장유물로 금강경 사경본을 안치하기도 했다. 금강경 사경본은 6m에 달하며 매일 새벽마다 하루에 3백자를 적어서 작업한 것이다. 또한 5년동안 매년 새해 벽두에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을 5백여 장 써서 사찰 신도들에게 보시하고 있으며, 대전시새마을지도자로 있으면서 1985년부터 1997년까지 12년 동안 소년·소녀가장 돕기에도 앞장섰다. 뿐만아니라 충남지방경찰청 경승회 활동에도 힘썼다.

지극한 불심(佛心) 때문이었을까? 그의 아내는 8년의 병환 끝에 발을 뗄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아내도 병에 차도를 보인 것은 그가 명장이 된 해인 2003년이다. 현재 아내는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는 상태이다.

그의 향후 계획은 후배양성과 한국인장문화의 복원이다. 그는 매주 3회 2시간씩 후진양성을 위해 강단에 서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작업을 했던 서체를 차곡차곡 모아두고 있다. 믿을만한 후배가 나타나면 ‘영인집’으로 엮어서 물려주기 위해서이다.

그는 틈틈이 한국전통 인장문화 복원을 위해 혼혈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한국인장에 대해 “중국의 강건함과 일본의 섬세함을 두루 갖춘 글씨”라고 평가하면서 “조선시대 옥쇄를 똑같이 복원하는 게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인장문화에 대해 그는 “인장은 사람의 이름뿐만 아니라 사람의 운명과 삶의 곡진한 길을 아로 새기는 작업”이라며 “사람의 이름이 강할 경우 유연한 서체를 쓰고 사람의 이름이 약할 경우 강건한 서체를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획일적인 컴퓨터 인장에는 조각사의 혼이 들어가 있지 않다”며 “인장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표의문자의 정신이 깃든 수천년 역사의 산물의 예술”이라고 덧붙였다.

최고는 못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자는 게 좌우명이라는 류철규 명장. 그는 최선을 다할 경우 최고가 된다는 삶의 법칙을 몸소 실천한 이 시대의 장인이다.
글=유응오 기자
사진=이한규 국장

# 류철규 명장 약력
대한민국 인장공예 명장
한국인장업연합회 자문위원
한국서예협회 충청남도 초대작가 겸 이사
한국서화작가협회 초대작가 겸 심사위원
대한민국고불서예대전 초대작가 겸 이사
일본 인장역학 1급 감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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