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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납자를 찾아서 ②- 일교스님

“청정한 초심 밝혀 한국불교 세계화 기여할 터”
장세훈 | 2007/03/17 13:43

18살 아프간戰 참전 계기, 유한적 삶 근본 회의
강화국제연등선원 원명스님 인도로 출가 결심

러시아하면 일단 광활한 대륙과 때묻지 않은 자연, 5월의 눈부신 백야(白夜)가 뇌리를 스친다. 그리고 백옥 같은 피부를 가진 금발의 늘씬한 미녀무희들과 도스토예프스키·톨스토이·푸쉬킨 등 세계 근현대 문학사를 빛낸 문호들의 대표작들도 떠오른다. 하나의 몸체에서 여러 인형이 쏟아져 나오는 마뜨로쉬카처럼 러시아의 매력적인 핏줄을 이어받은 젊은 스님 한 분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이 달 〈벽안(碧眼)의 납자를 찾아서〉의 주인공은 바로 강화국제연등선원을 거쳐 현재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수행정진 중인 일교(日皎)스님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유럽 쪽에서 출가한 외국인 스님들은 많이 봤지만, 저 완고한 옛 공산주의의 메카 러시아에서 한국불교가 좋아 만사를 제쳐두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니 본 기자는 스님을 만날 생각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소년처럼 수줍으면서도 한편 마음수행의 깊이가 느껴지는 따스한 미소가 인상적인 일교스님. 또한 스모크 블루(smoke blue)색 눈동자에서는 구도자 특유의 우수가 언젠가 본 흑백무성영화 속 나무 한 그루처럼 언뜻 내비치고 있었다. 기자는 냉큼 스님의 고향부터 묻고 싶어졌다.

“제 고향은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와 같은 모스크바 근교의 야스나야 빨랴나지방입니다. 그런데 혹시 그거 아시나요? 흔히 독실한 기독교 작가로 알려진 톨스토이도 생애 마지막 몇 년 간에는 불교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느닷없이 고향을 묻는 기자에게 스님은 톨스토이에 관한 의외의 정보를 쏟아놓는다. 일교스님과의 대화는 그렇게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진행됐다. 단, 아직 한국어가 서툰 스님과의 원활한 대화를 위해 인터뷰 전반은 영어로 진행됐다. (참고로 일교스님은 현재 동국대 어학원에서 1년 넘게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일교스님은 놀랍게도 출가 전 18살 어린 나이에 군에 징집돼 약 2년 간 러시아(구 소련)특수부대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 스님은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간의 전쟁에 투입돼 국경 근처를 수비하고 무기 밀수 및 부대 감시를 수행하는 중역을 맡았는데, 살벌한 긴장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나날들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할 정도였다.
비록 군인신분으로 사람을 직접 죽이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생사(生死)가 일촉즉발에 몰린 격전의 현장에서 어느 누가 살인자이고 피해자인지를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무모하듯, 2년 간의 군생활은 그 전까지 스님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송두리째 바꿔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제대 후 다시 대학에 복귀한 스님은 학업에 전념해야 했지만, 예전처럼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세상만사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밀려왔고, 심지어 자신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일찍이 전쟁을 경험한 세대에게 전쟁 그 자체가 평생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 예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그 충격의 상흔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만한 사람은 예상할 수 있으리라.

처음에 스님은 러시아 고유의 민족종교라 할 수 있는 러시아 정교회에 의지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공산주의 정권탄압의 영향으로 따를 만한, 존경할 만한 스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는 친구의 소개로 한 정신의학자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티벳불교를 비롯해 일본 선불교 등을 처음으로 소개받게 된다. 이후 일교스님은 각종 불교관련 도서를 탐독하며 불교의 매력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됐다고.
덧붙여 몇몇 친한 친구들과 그룹을 형성해 함께 불교를 공부하던 중, 평생의 반려자가 될 뻔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잠시 아내가 됐던 여자는 결혼 후 얼마 안가 만성천식이 악화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당시 스님의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이른 나이에 인간사의 가장 어두운 면인 전쟁의 참화를 목격한 것도 모자라, 가장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까지 목도하게된 현실은 끔찍하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스님은 만약 그 전에 불교를 알지 못했더라면 일련의 아픔들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황이 이쯤 되니 스님은 출가의 뜻을 더욱 굳힐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물론 결혼 전(약 1992년도)에도 우연히 성철스님의 제자이자 외국인 포교의 산증인인 원명스님의 초청강연회를 접할 기회가 있었고 당시 받은 감화 덕에 막연히 한국에서의 출가도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막상 출가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스님은 1999년 홀연히 한국으로 건너왔고, 원명스님이 당시 선원장을 맡고 있던 강화연등국제선원에서 2년여의 본격적인 행자생활을 시작한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문화권에서의 수행자 생활은 당연히 상당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특히 첫 한달 간의 생활은 무척 고단하고 힘든 나날이었다. 언어소통의 괴로움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 고국 러시아와 확연히 다른 기온과 습도차로 인한 고충이 제일 심각했다.
하지만 은사인 원명스님을 비롯한 각국에서 몰려든 도반들의 도움으로 생활에 차츰 적응해갔다. 특히 같은 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어는 물론 한국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한 사형 일조스님의 도움은 지대했다. 일조스님에게는 수행생활 중 겪는 말못할 고충들도 자유롭게 상의하고 자문을 얻을 수 있었다고. 또한 2002년 원명스님이 열반에 든 이후로는 같은 해인사 문중의 큰 어른인 원택스님이 후견인을 자처해 여러 도움을 받았다.

이후 해인사에서 6개월 간의 행자교육과 수회에 걸친 백련암에서의 입산수행, 10번 이상의 안거 결제를 통해 스님은 지금에 이르게 됐다. 지난날을 떠올리면 시간이 참으로 빨리 스쳐지나간 것만 같다. 앉아서 하루 8∼9시간 지속되는 강의를 듣는 것도 고역이었던 하근기의 수행자는 어느새 연등국제선원을 찾은 내·외국인들을 상대로 참선이니 다도를 교육할 정도로 우뚝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유독 만행을 좋아한다. 안거기간을 전후로 전국의 유명 산과 사찰을 돌다보면 계절에 따라 저마다의 아름다움으로 옷을 갈아입는 한국의 오밀조밀하면서도 섬세한 산천에 자연 탄복이 쏟아진다고. 스님은 앞으로도 운수납자라는 수식이 낯설지 않도록 시간이 허락되면 자주 만행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듯 수행자로서 스님이 서원한 사항은 소박하면서도 수행자의 본분에 충실한 것들뿐이다. 계속 선방에서 열심히 참선공부 할 수 있을만한 체력과 건강이 뒷받침됐으면 하는 바람이나, 초심을 잃지 않고 맑은 마음가짐으로 법을 참구하는 것, 나아가 한국불교 세계화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다는 포부 등은 일교스님을 한층 빛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스님께 합장하고 발길을 돌리는 기자의 발걸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문득 햇살이 따스해 하늘을 보니 오전까지 찌푸렸던 초봄의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일교 스님은 ?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 야스나야 빨랴나 지방 출생
18살 군대에 징집돼 아프가니스탄 전에 참전, 삶에 근본적 회의를 품음.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시작.
1992년 원명스님 초청강연을 접하고 출가 기도.
1999년 돌연 한국행, 강화국제연등선원에서 출가
2000년 원명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2005년 비구계 수지
강화국제연등선원에서 내·외국인 상대로 참선 및 다도를 교육했으며, 현재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사무를 보며 수행정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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