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훈 | 2007/10/30 10:11

말레이시아 출신, 홍콩서 숭산스님 법문 듣고 출가 발심 원력 세워

한국 선(禪)불교를 본격적으로 배우고자 국내를 찾는 벽안(碧眼)의 납자들에게 충남 계룡산자락에 위치한 무상사(無上寺, 조실 대봉·주지 무심스님)는 서울 화계사 국제선원과 더불어 반드시 들러야할 성지(聖地)와 같다.

이곳엔 내달 말이면 열반 3주기를 맞는 해외 포교의 신화 숭산 행원 대종사의‘세계일화(世界一花)’의 서원이 서려있고,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매순간 한결같은 마음과 자세로 시퍼렇게 용맹정진하는 외국인 스님들로 즐비하다.

특히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의 최고참 어른인 조실 대봉스님과 엄격한 선풍을 확립해 후배스님들로부터 ‘계룡산호랑이’로까지 불리는 주지 무심스님은 무상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여기 또 한 분의 인상깊은 외국인 스님을 소개한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명안(明眼)스님이 바로 그 주인공.

겉으로 봐선 그저 선방에서 홀로 참선삼매에 드는 것을 낙으로 삼을 것 같은 고아한 풍모가 인상적인 명안스님이지만 실제의 스님을 그렇게 단편적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일례로 6~7년 전 무상사 건축불사 당시 사찰부지 곳곳을 종횡무진하며 불사를 진두지휘한 것하며, 오랫동안 무상사의 총무·재무 등의 주요 직책을 도맡아 절집안 살림을 관리해왔다는 후문을 듣고 났을 때 기자는 명안스님을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였다.

명안스님은 말레이시아의 북부 이포(Ipoh) 市서 나고 자랐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었지만 비교적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었기에 큰 어려움 없는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1남 1녀 중 장남이었던 스님은 유독 학업성적이 좋아 홀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이후 스님은 영국 뉴캐슬대학(New Castle Univ)서 건축공학을 전공하고 졸업과 동시에 홍콩 금융가서 자산관리사로 활동하는 등 그야말로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세속적 성공의 삶을 이어간다.

속가 나이 33살 되던 1992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한국의 이름 모를 선사 한 분이 홍콩 중심가에 위치한 대형 강연장에서 법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법회가 있던 날 밤 마침 다른 계획이 없었던 스님은 친구와 함께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강연장을 찾았다. 당시 이미 불교에 관심이 많았기에 책으로만 접하던 법회를 실제로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에 크게 설레었다. 하지만 막연한 설렘도 긴장도 잠시, 법석에 올라 한시간 넘게 막힘 없는 법을 설하는 선사의 모습에 그야말로 압도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스님은 친구와 함께 밤새도록 법회에서 들었던 선사의 사자후를 곱씹으며 불법(佛法)에 관해 토론했다. 다음날 아침, 곤한 몸을 뒤척이던중 문득 깨달았다. ‘지금껏 어느 누구도 나를 이토록 강렬하게 사로잡은 이는 없었다. 그 분은 나의 구루, 나의 멘토, 내가 오래도록 기다려온 참스승인 것이다’.

명안스님이 기억하는 숭산스님의 가르침에 관한 인상은 대략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Simple(쉽고)’‘Direct(직접적이며)’‘Clear(명쾌하다)’. 명안스님이 보기에 숭산 큰스님은 짧은 법문 안에서도 매우 논리적이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심장 속으로 내리꽂히는 정수의 언어만을 골라 말씀할 줄 알았다.

숭산 행원스님과의 인상적인 첫 조우를 기점으로 명안스님의 일상은 확연히 바뀌기 시작했다. 스님은 전에는 한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불교식 수행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불교관련 책도 다량 구입해 탐독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홍콩 젠센터(Zen center)에 등록해 일주일에 3번씩 명상·참선·경전 등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스님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93년 겨울 돌연 한국을 방문, 신원사서 처음으로 동안거 결재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사부대중이 한데 어울려 참여한 당시의 체험은 스님에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따스한 나라서만 살아왔기에 한국의 매서운 추위부터가 고행이었는데도, 마음만은 날이 갈수록 편안해짐을 느꼈다. 살면서 이렇게 평화로웠던 적이 또 있었나 싶을 만큼 너무나 행복했다.

스님은 이듬해인 1995년 겨울에도 한차례 동안거 결재에 참여하게 된다. 안거 체험은 갈수록 스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것도 강렬히 뿌리째 흔들었다. 그 무렵부터 차분히 출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혀갔다. 다만 마지막 남은 일은 일평생 자식들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 헌신해온 홀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평소 선원에서 명상 및 참선 등을 배울 정도로 적극적인 불교신자로 살아온 어머니였지만 출가 결심을 고백하기란 녹록치 않았으리라. 그러나 걱정이 컸던 만큼 다행히 큰 후폭풍은 없었다.

1997년 2월, 다시 한국을 찾은 명안 스님은 서울 화계사서 숭산스님을 은사로 드디어 속세의 무명초를 벗는다. 38살, 비록 늦은 출발이었지만 젊은 스님들 못지않게 열심히 수행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화계사에서의 사미 생활은 비교적 적응하기 쉬웠다. 처음엔 하루 하루가 새로운 모험과도 같은 일상이었지만, 주변의 도반스님들과 무엇보다 정신적인 위안을 주는 큰 스승 숭산스님이 계셨기에 견딜 수 있었다. 문화적 차이도 다른 외국인 스님들보다는 크지 않았다. 특히 외국인(유독 서구권) 스님들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마(魔)의 코스(?)’인 음식문화 적응에 있어서도 같은 쌀 문화권에서 자라온 탓도 있고 애초 짜고 매운 음식에 익숙했던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되려 한국음식이 입에 맞았다.

스승인 숭산스님의 가르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안스님은 임제선사가 남긴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들었다. 처음 살불살조의 고사를 들었을 때 스님은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당시까지 스님의 마음 속에 부유하던 어떤 안개 같은 것들이 걷히면서 동시에 가슴을 콱 틀어막는 어떤 화두 같은 걸 안겨준 셈이다. 이후부터 스님은 스승의 ‘오직 모를 뿐’의 가르침을 부여잡고 화계사 및 무상사·신원사 등 전국 유명 선원을 순회하며 용맹정진을 거듭해 나간다.

수행 도중 경험한 재미난 일화 한 자락도 들려줬다. 어려서부터 중화（中華）권에서 생활해온 스님이기에 여름철에 별미로 제공되는 ‘냉면’이 그리 입에 맞질 않았다고 한다. 중화권에선 면류를 보통 튀겨먹거나 데워 먹는 게 일반적이다. 고로 스님에게 냉면은 신기하다 못해 꺼려지는 종류의 음식이었다. 그런데 한 번은 여름 안거시 제공된 냉면을 공양하는데 그날따라 평소와 달리 상당히 맛있게 여겨지는 것이었다.

같은 입에, 같은 냉면인데 어떻게 맛이 이리 달라질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스님의 마음씀에 답이 있었다. 맛있다, 맛없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의 마음을 거둬내고 눈앞의 음식을,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접하고 나니 그저 여여(如如)할 뿐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 언뜻 전해듣기엔 그저 단편적인 일화에 불과하겠지만, 스님에게만은 이 일화가 오도의 순간 마냥 생생히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을 넌지시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이 역시나 여여하다. “그저 ‘오직 모를 뿐’을 견지하며 참선수행에 정진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고 예의 그 환한 미소를 잊지 않는 명안스님을 마주 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마음 속까지 훤해지며 신심이 절로 나는 기분이었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하산하는 길목에서 기자는 저녁 어스름이 형형색색 단풍과 어울려 곱게 번지는 가을 산자락을 눈으로 좇던중 문득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해짐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송아지처럼 눈이 맑은 스님을 만난 덕 같았다.
계룡산 무상사=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사진: 이한규 업무국장



명안 스님은 ?
말레이시아 북부 이포 市서 나고 자람
영국 뉴캐슬(New Castle)대서 건축공학 전공
졸업 후 홍콩 금융가서 자산관리사로 활동
1992년 홍콩서 열린 숭산스님 법회 듣고 충격
1993년 겨울 한국행, 신원사서 첫 동안거 결재
홍콩 복귀 후 출가 결심 굳힘
1997년 화계사서 숭산스님 은사로 사미계 수지
1999년 홍콩서 숭산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계룡산 무상사 불사시 주도적 참여,
무상서서 재무·총무스님직 등을 수행한 바 있다.
현재 무상사서 용맹정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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