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훈 | 2007/11/26 14:14

숭산당 행원 대종사(1927∼2004)의 열반 3주기를 기념하는 추모전시회가 열린 지난 20일. 이 날은 전 세계 21개국서 몰려든 2백여 명의 외국인 제자들이 참가해 한층 그 의미를 더했다. 개막행사의 사회와 통역을 맡은 한 스님의 눈빛이 어느 순간 촉촉이 젖어 들었다. ‘벌써 3주기라니….’ 은사(恩師)의 생전 가르침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 한껏 감회에 젖은 표정이었다. 이 스님은 바로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들을 대표해 이번 추모전시회의 기획 단계서부터 준비과정에 이르기까지 총 책임을 맡은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무심(無心) 스님이다.
무심스님의 그윽한 표정 속에서 은사인 숭산스님을 향한 무한한 애정과 그리움의 결을 읽고 나니 기자는 문득 언젠가 기사를 통해 접한 숭산스님과 무심스님 간의 일화 한 토막이 파스텔톤의 유화처럼 떠올랐다. 생전 숭산스님이 갑자기 병이 악화돼 국내의 한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당시 스님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온갖 시중과 간호를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무심스님이었다.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는 스님의 손길이 어찌나 지극 정성이었던지 담당의사는 물론 간호사들까지 감복할 정도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숭산스님에게 “저 외국인은 대체 누구인가요?”하고 물었더니, 스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한 마디 하셨다는 것이다. “어, 내 아들!”.
이 짤막한 일화 하나만으로도 숭산스님과 무심스님의 관계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으리라. 물론 모든 제자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관음보살과도 같이 자애롭기 이를 데 없었던 숭산스님이었기에 이외에도 여러 제자들과의 훈훈한 일화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겠지만, 무심스님과의 일화는 뭔가 더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한 재자 한 제자를 친자식처럼 아꼈던 큰스님. '세계는 한 송이 꽃'이라는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일념으로 시작된 스님의 원력은 이렇듯 다름 아닌 인재불사로 귀결된다.

무심스님은 1958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시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조쉬아 헨리 레아. 스님은 아버지가 유명 대학교수인 유복한 유대인 교육자 집안서 성장했다. 스님 역시 명문 보스턴대에 입학, 화학과를 전공했다. 하지만 촉망받는 예비 과학도였던 청년 조쉬아는 대학시절부터 명상·요가 등 동양의 정신수행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가슴 한 구석에 생(生)에 대한 회의가 밀려오기 시작했고, 스님은 이를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다. 자신의 본래면목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당시 스님의 젊은 패기와 고집스러움에는 모교인 유대교조차 위안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긴밀한 유대교 커뮤니티가 참된 수행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스님은 보스턴에서 열린 달라이라마의 법회에도 참여하고, 숙련된 요가선생과 힌두교 구루·일본 선사 등도 만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깨달음을 갈구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스님이 바라는, 혹은 감동시킬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79년 케임브리지 선원에서 숭산스님을 처음 만났다. 짧은 영어실력을 십분, 아니 백분 활용하는 숭산스님의 독특하면서도 간명한 화법은 청년 조쉬아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어 메사추세츠 주의 알스톤이란 곳에서 또 만났다. 이번에 조쉬아는 용기를 내어 선사에게 질문했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가 질문이었고, 숭산스님은 뚫어질 듯 조쉬아를 응시하며 “모두 내려놓게나! 이것이 참된 수행일세”라고 화답했다. 청년 조쉬아는 그 자리에서 전기에 감전된 듯 했다. 출가를 하라든지, 아니면 좌선을 열심히 하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모든 걸 내려놓으라’는 방하착(放下着)을 권하며 “모르는 마음으로 오로지 곧장 나아가라!”고만 짧게 덧붙이는 숭산스님의 가르침은 일절 군더더기가 없는 명언 중에 명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청년 조쉬아는 숭산스님의 방하착 한마디를 떨쳐낼 수 없었다. 결국 조쉬아는 출가를 결심한다.
1983년 재미 홍법원 프로비던스선원에서 행자생활이 시작됐다. 그렇게 1년여가 흐른 어느 날 숭산스님이 불러 앉히며 “한국엔 외국인들을 위한 국제선원이 없으니 네가 가서 터를 닦아봐라”고 말했다. 은사의 고국, 수천 년 내려온 불교의 오랜 승가전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나라, 코리아. 한국은 스님으로써는 낯설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만큼 호기심이 일게 하는 곳이었다. 또한 얼마간은 수행의 연장선상으로 생각하자는 심산도 컸다. 임제선사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듯 어느 곳이든지 그 환경을 탓하거나 영향 받지 않고도 진리는 항상 나와 함께 존재한다는 확신을 갖고 나아간 것이다.

그렇게 1984년 4월 한국에 입국, 화계사에서 ‘무심(無心)’이란 법명을 받고 본격적인 승려생활을 시작했다. 80년대 초반 한국은 미국에 비해 여러모로 불편한 것 천지였다. 대부분의 사찰에는 수세식 화장실은커녕, 세탁기·냉장고 하나 변변히 갖추지 못했다. 아무리 수행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참고 견디려 해도 스님도 인간이기에, 솔직히 생활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겨울에도 찬물로 목욕을 하고 손으로 일일이 빨래를 해야 했고, 특히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는 한국말을 익히기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은사인 숭산스님 역시 화계사에 함께 상주했던 게 아니라 유럽 각지를 종횡무진하던 시절이었기에 무심스님은 누구에게 조금이나마 마음놓고 기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또 당시 한국사회의 정치적 혼란 또한 상당해서 여러모로 적응이 녹록치 않았던 시절이다.
하지만 모든 건 시간이 약이랬던가. 스님은 몇몇 한국스님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으로 한국말 실력이 늘었다. 현재 대구 관음사 주지 우학스님 등이 대표적인 어학도반인 셈. 가장 골치였던 언어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한국생활에 재미가 붙었다. 매해 안거 때마다 수덕사·신원사 등지서 정진도 수십 차례 했다. 1986년에는 범어사에서 비구계도 수지 받았다.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으로는 처음 조계종 승적을 갖게 된 것이다. 이후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에서 지도법사 자격을 획득하고 내외국인을 상대로 공안지도를 할 수 있게 됐다.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주지 등을 맡다가 2002년에는 부산 남산국제선원을 개원하고, 2003년부터 현재까지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 및 지도법사직을 수행하고 있다.

무심스님은 무상사 불사 초기부터 이런 저런 일을 주도적으로 참여해왔고 주지 소임을 맡은 후부터는 대웅전을 비롯해 건물 정비에 각별한 열정을 쏟았다. 최근에는 맨 건물들에 단청을 입히느라 또한 여념이 없다. 하지만 무심스님은 건물불사 자체보다는 사람을 키우는 ‘인재불사’가 더 소중함을 강조했다.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를 할 때부터 스님은 법을 논할 때, 선방에서 참선 및 화두정진에 들어갈 때만큼은 누구보다 매섭고 철저한 자세를 견지한다. 스님은 말한다.
“평상시 항상 인자했던 숭산 큰스님도 법을 설하실 때만큼은 빈틈이 없으셨어요. 스님은 늘 말씀하셨죠. 옛말에 이르길 ‘조그만 틈이 산골짝처럼 커질 수 있으니 항시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고 말이죠. 자고로 선원은 수행자들의 질이 우선입니다. 무상사의 외형이 커지고 좋아진다고 해서 기뻐할 사람은 주지인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숭산스님이 특별히 점지해 준 이 천하명당의 땅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 세계 만방에 떨칠 위대한 수행자들을 배출해내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첫째도 둘째도 철저한 수행가풍을 확립하는 게 제일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주지로서 제가 가장 중점을 둘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20여 명 벽안의 납자들이 가열 차게 수행하고 있는 무상사는 일반 재가자(성별 관계없이)들도 방부만 들이면 누구나 언제라도 스님들과 함께 정진할 수 있다. 특히 안거 철이 다가오면 여느 선원 못지 않게 수행의 열기로 뜨겁다.
인터뷰 마지막으로 기자는 한국불교 발전을 위한 제언 한 마디를 조심스레 청했다. 다소 난감한 질문임에도 스님은 역시나 명쾌하게 답했다.
“스님들과 신도들의 간격이 더 좁혀져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 중에는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든 신심이 대단한 신도들이 참 많은데, 정작 스님들 중에는 사부대중이 한데 어울려 원융화합하는 사찰 만들기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한 분들이 있습니다. 스님들부터 일단 하심하는 습관으로 재가불자들과 벽을 허물고 더 친밀하게 다가가 그들의 고통을 불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들을 적극적으로 내놓아야 합니다. 숭산스님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나는 스님이다, 고로 내게 절을 하고 예를 다하라'는 식의 태도는 취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매우 겸손하셨고 하나가 되려 노력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면면을 배워야 합니다. 전통이나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부처님이 가섭에게 정법안장의 미묘법을 전했듯 가슴으로 소통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무심스님의 충고 그대로, 수행은 이렇듯 어디에서나 언제나 계속된다. 어느 누구도 수행의 끝을 논할 수 없다. ‘오직 모를 뿐’인 마음으로 ‘오직 할 뿐’인 게 바로 수행의 본질인 것이다. 스님은 수행자들의 영원한 화두인 ‘공(空)’이 또 다른 ‘공(共, Public)’으로 화(化)할 때야 비로소 사부대중이 모두 평화로운 이상적인 세계가 된다고 보았다. 모든 것을 공개할 수 있는 투명한 세계, 신도들의 신심을 공명정대하게 환원하는 아름다운 수행공동체, 바로 이것이 무심스님이 화두처럼 강조하는 수행자의 나아갈 ‘길’이었다.
계룡산 무상사=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사진= 이한규 업무국장


무심 스님은 ?

1958년 미국 필라델피아 출생
1979년 보스턴대 화학과 재학시 숭산스님 만남
1993년 프로비던스 선원서 행자생활
1984년 한국 입국, 화계사서 기거
1986년 부산 범어사서 비구계 수지
1985년부터 정혜사·수덕사·신원사 등지서 안거 수 십 차례 참여
1997년 화계사 국제선원서 지도법사 자격 인증
1999년 화계사 국제선원 수석지도법사로 활동
2003년부터 현재까지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 주지·지도법사 맡아 참선 및 공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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