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오 | 2008/01/28 11:00

외롭고 높고 쓸쓸한 ‘역관역은’의 예술혼

왕유의 초상

시불(詩佛) 왕유(王維 700∼761)의 현존하는 시 3백8편·3백76수를 우리말로 옮기고 상세한 주석을 단 책이 출간됐다. 역자는 왕유 연구의 국내 최고 권위자인 박삼주 교수.
왕유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으로 시선(詩仙) 이백, 시성(詩聖)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으로 꼽힌다.
왕유는 시뿐만 아니라 그림에서도 일가를 이뤄 남종수묵화의 시조로도 추앙 받고 있다. 소동파(蘇軾)는 그의 시화를 가리켜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畵中有詩)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시불(詩佛)이라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왕유의 시세계는 매우 불교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녹채(鹿柴)〉을 살펴보자.

왕유의 〈장강적설도〉. 소동파는 왕유의 시화를 일컫어 ‘詩中有畵畵中有詩’라고 극찬했다.

빈 산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말소리만 들려오는데/ 저녁 놀빛 깊은 숲속으로 들어와선/ 다시 또 파란 이끼 위를 비춘다.
〈녹채〉는 왕유의 선시(禪詩)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작품이다. 1연과 2연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 즉, 육근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참된 깨달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
이어 3연과 4연에서는 어두운 울창한 수림 속 바위틈의 이끼에도 석양 무렵 한줄기 빛이 비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3연과 4연의 이끼의 푸른색과 저녁놀의 검붉은색이 보이는 대조는 휘번한 깨달음의 세계와 무명 속을 헤매는 우매한 중생들의 비유이기도 하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매우 선명하게 선(禪)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왕유. 그래서 그의 시는 노래인 동시에 그림인 것이다.
왕유는 19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21세에는 과거 중 최고 시험인 진사에 급제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운명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간신들의 전횡이 판치는 시대상황에서 그는 적극 항거하지도, 그렇다고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31세에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왕유는 40대에 들어 별장 ‘망천장(輞川莊)’을 마련하고 관직에 있으면서도 자연에 은거하는 ‘역관역은(亦官亦隱)’의 삶을 살아간다.

‘역관역은’은 시대상황에서 왕유가 택한 삶의 방식인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한다. 왕유는 치욕으로 얼룩진 삶 앞에서도 ‘외롭고 높고 쓸쓸한’ 예술혼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왕유의 시세계가 이 시대에 울림을 줄 수 있는 것도 그가 택한 ‘역관역은’의 자세에 있다. 치열한 생존 경쟁의 틈바구니를 헤매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많은 부분 현실의 시련 앞에서 신음했던 왕유의 삶을 닮았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의 ‘망천장’은 어디 일까?

붉디 붉은 열매는 산 아래에서 살며시 껍질을 열고. 맑디맑은 향기는 날씨 차가우며 더욱 짙게 풍기나니/ 산수유는 바야흐로 계수나무 꽃떨기와 함께/ 창문 앞에서 맑고 밝은 가을 달을 향하고 있구나
-〈산수유〉 전문

맑고 밝은 가을 달을 향해 붉디 붉은 열매를 떠뜨리는 산수유처럼 만월, 그 모든 변을 여의어 둥근 자리를 향해야 할 것이다.

왕유 시전집/ 박삼수 역주/ 현암사/ 3만8천원

유응오 기자 arche@jub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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