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일 | 2008/06/09 11:46

‘유옥’이라는 삼계화택 벗어나기 위한 소녀의 모험기



미야자키 하야오는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도에이 동화에서부터 〈루팡 3세〉 〈미래소년 코난〉 〈플란다스의 개〉 등 걸출한 작품에 참가했다. 1984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다카하시 이사오와 함께 설립하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흥행에 성공했다. 매 작품 일본 영화사를 다시 쓸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는 1997년 〈모모노케 히메〉를 마지막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2001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작품으로 대중에게 돌아왔다. 그의 작품 중 가장 ‘미야자키 하야오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담겨 있는 불법(佛法)을 찾아봤다. 〈편집자 주〉


“처음 받은 꽃이 이별의 꽃이라니, 싫어.”
아버지가 운전하는 아우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있는 소녀가 울듯이 이야기한다. 앞자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괜찮아”를 연발한다. 이내 가족은 자신들이 새로 이사할 집을 찾지만 이미 길을 지나친 상황. 아버지는 호기롭게 도로 사이에 난 산길을 올랐지만, 그 끝에는 돌상과 빨간문이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하 센과 치히로)〉의 이야기는 치히로의 가족이 빨간 문을 지나 새로운 세계로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낯선 세계에서 부모는 아무도 없는 가게의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만 홀로 남게 된다. 치히로를 구해준 것은 미소년 하쿠. 하쿠는 길섶의 열매을 먹게 해 치히로에게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무대는 마녀 유바바가 운영하는 ‘유옥(油屋)’이라는 온천장으로 넘어간다. 이곳 또한 희한한 곳이다. 치히로(千尋)는 ‘일하지 않으면 유바바가 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이 ‘유옥’에서 유바바에게 ‘센(千)’ 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일을 하게 된다. 치히로이자 센은 ‘유옥’에서 부모님을 구하고,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 삼계화택에서 벗어나기
〈센과 치히로〉의 공간적 주 무대는 바로 ‘유옥’이라는 곳이다. ‘유옥’이라는 곳은 앞서 말했듯이 온천장이자 목욕탕이다. 목욕탕은 물과 불이 만나는 장소이다. 필요로 하는 것은 물이지만 뜨거운 물을 만드는 것은 불이다. 치히로가 ‘유옥’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도 온천물을 만드는 팔이 여섯 개 달린 가마 할아범이다.

‘유옥’은 말 그대로 ‘기름 집’ 즉, 불타고 있는 집이다. 화택(火宅)은 《법화경(法華經)》에 쓰인 유명한 비유이다. 화택(火宅)은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로 점철된 이 세상을 뜻한다. 이 세상을 태우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불길은 지배욕이나 소유욕과 같은 ‘욕망’ 혹은 ‘집착’이다.

‘유옥’은 일본의 만신들이 지치고 힘든 몸을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유바바에게 일정 부분의 돈을 지불한다. 노동에 대한 보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유옥’은 이미 ‘신들이 쉬어가는 곳’이 아닌 단순한 ‘영업장’으로 비춰진다.

이곳에서 보여지는 군상들도 대부분은 물욕과 식욕을 좇는 범부들이다. 도마뱀 고기나 사금을 보며 모여드는 종업원·항상 돈과 보물을 세고 있는 유바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유옥’과 판자촌의 콘티에 “일본 환락가의 정점, 화려하고 현란한 양식, 뒤범벅된 동아시아 스타일”이라고 메모해 놓았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화택의 이미지를 가진 ‘유옥’에 물의 이미지를 결합해 한번 더 비틀기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에서 불은 ‘파괴’를, 물은 ‘정화’의 이미지를 의미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거신병이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불의 7일간’이나 〈모모노케 히메〉의 생명의 상징인 사슴신이 쉬어가는 샘은 이런 역할의 이미지를 대변해준다.

유바바가 불의 이미지라면 치히로(센)는 물의 이미지다. 치히로는 목욕탕의 때를 벗기고 약수를 길어온다. 치히로는 항상 물과 함께 한다. 오물신을 강의 신으로 정화시킨 것도 치히로였다. 본래 강의 신이었던 하쿠와의 첫 기억도 치히로가 ‘코하쿠 강’에 빠진 것이다.(하쿠는 치히로가 자신을 기억해냄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가오나시가 많은 금을 보여 줬을 때도 치히로는 “내가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야, 그렇게 많이도 필요 없어”라고 잘라 말한다. 결국 ‘유옥’이라는 삼계화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은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 경계의 이미지 ‘중도(中道)’
작품에서 터닝 포인트는 치히로가 기차를 타면서부터다. 갈 수만 있고 되돌아올 수 없는 기차. 늪의 경계를 돌아 ‘늪의 바닥’역을 지나 사라지는 기차의 이름은 ‘중도(中道)’이다. 그 기차를 타고 치히로는 ‘늪의 바닥’으로 향한다. 기차가 지나가는 선로는 물에 반쯤 잠겨 있다. 기차는 바퀴 부분을 물에 담그고 나머지는 하늘을 향해 몸체를 드리우고 지나간다.

‘중도’의 기차길에는 끊임없이 수평선의 경계만이 비춰진다. 〈센과 치히로〉의 모든 것은 경계에 걸쳐있다. 물과 불·치안과 피안·욕망과 정화·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목가적이고 동화적인 이미지의 ‘중도’ 기차의 여정을 통해 완전히 하나가 돼 진망화합한다.

승객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에게는 형상이 없다. 거무스름한 형태만 있을 뿐이다. 각자의 마을은 있지만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마치 ‘있고, 없고’의 존재를 떠난 듯한 모습들이다.

이렇듯 미야자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에서 생성시킨 이미지들은 이 같은 경계를 흔들면서 미묘한 자장을 형성시킨다. 이런 자장은 우리에게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사유케 해주는 단초로 작용한다.

# 떠난채 돌아오지 않는…
용수는 《중론》에서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공성이라고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施設)된 것이며, 그것은 ‘중도’ 그 자체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일체의 존재는 ‘있고, 없고’의 양변의 존재를 떠나 있다는 말이다.

치히로와 센이라는 존재는 결국 ‘하나’였다. 모든 존재의 실재(實在)는 다만 연에 의한 잠깐의 이름에 불과하다. 〈센과 치히로〉의 세계는 모두 치히로와의 관계에서 이뤄진다. 이야기의 축이 되는 하쿠와 가오나시는 치히로와의 관계가 없으면 초점이 맞지 않는 캐릭터이다. 이렇게 치히로가 만나고 경험하는 인연들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센과 치히로〉가 가지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도 인상적이다. 마치 선문답과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간다. 하쿠와 함께 돌아온 치히로를 맞는 것은 유바바와 12마리의 돼지들이다. 유바바는 치히로에게 “여기서 부모를 찾아봐라”라고 소리친다. 찬찬히 둘러본 치히로는 “없어요”라고 말한다. 물론 정답이었다.

월호스님은 이 부분을 자신의 책 《영화로 떠나는 불교여행》에서 “무(無)야말로 자신의 본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것”이라며 “이것은 무심의 경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당당하게 무심의 입장에서 부모를 되찾은 치히로가 내적으로 성장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센과 치히로〉는 단순히 성장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 문을 통과하면서 치히로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에게 꼭 붙어 있고, 어머니는 “치히로 그렇게 붙지마. 걷기가 힘들잖니”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작인 〈귀를 기울이면〉이나 〈마녀배달부 키키〉 같이 장래를 고민하고 이를 모색하던 모습을 보여줬던 소녀들과 치히로는 확연히 다르다. 이는 “10세의 여자 친구에게 이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처럼 10세의 치히로는 아직 삶의 방식을 정해서 움직일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그런 소녀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키무라 유미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가 엔딩 테마로 흐르며 치히로 가족은 이상한 세계를 뒤로 한 채 산길을 내려간다. ‘유옥’에서의 생활을 추억할지에 대한 나레이션이나 복선도 없다. 그냥 떠나갈 뿐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정작 센과 치히로는 행방불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떠난 채 돌아오지 않을 그들을 보며 정작 ‘우리 자신이 행방불명돼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중일 기자 bono98@jubul.co.kr



“산산조각 부서진 거울 위에도
새로운 풍경이 비춰진다
바다에서는 더 이상 찾지 않아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 키무라 유미의 〈언제나 몇 번이라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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