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일 | 2008/11/24 10:50

‘나는 누구인가’라는 성찰 던지는 히치콕풍 애니 스릴러

1997년 충격적인 애니메이션이 개봉됐다. 폭력과 섹스·스릴러가 한데 어우러진 이 작품은 당시 애니메이션으로는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을 포함했지만 일반 대중들부터 평론가들까지 일제 호평했다. 〈천년여우〉 〈파프리카〉등 굵직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호평을 받은 곤 사토시 감독의 〈퍼펙트 블루〉가 그 충격의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장면과 탄탄한 스토리 라인은 현재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에 애니메이션 〈퍼펙트 블루〉를 통해 해석될 수 있는 불교적 사상에 대해 알아봤다.

주인공 미마를 죽이려는 가짜 미마. 가짜 미마는 실제 미마의 매니져 루미다. 작품에서는 미스테리한 장면들을 통해 존재론적 사유를 관객에게 되묻는다.

‘나는 누구인가’혹은 ‘지금의 내가 과연 진짜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근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부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폭주하는 매스미디어 사회에서 과연 무엇이 진짜인지 어떤 게 환영인지를 기실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엔터테인먼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이성이나 감성에 속한 요소를 통해 인식하는 게 아니라 단순한 집단 무의식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면서도 군중 속의 ‘외로운 섬’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이와 상동하다.

곤 사토시 감독의 1997년 작인 〈퍼펙트 블루〉는 화려한 ‘타자’인 아이돌 스타를 통해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퍼펙트 블루〉가 한국에 소개된 것도 같은 시기 제1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초청작으로 상영되면서부터. 하지만, 정식 개봉된 것은 7년이 지난 2004년이 돼서다. 단순하게 보자면 수위가 높은 폭력·섹스 신이 존재하고 그 묘사가 매우 디테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탄탄한 스토리 라인과 꼼꼼한 작화·자기 분열을 보여주는 시퀀스 등은 많은 매니아 층을 양산해 나갔고, 이는 현재까지도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획기적인 작품이다. 실제 미국 개봉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디즈니와 故 알프레드 히치콕(영화〈싸이코〉등을 만든 스릴러의 거장)감독이 만나 영화를 만든다면 이 같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호평하기도 했다.

아이돌 그룹 '챠무'의 마지막 콘서트 장면. 사건의 발단은 그룹의 리더인 미마가 돌연 탈퇴선언을 하며 시작된다.

먼저, 다중인격과 정신분열이라는 신경증을 통해 ‘진정한 나는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는 〈퍼펙트 블루〉의 스토리를 살펴보자.

인기절정의 아이돌 그룹 ‘챠무’의 야외 콘서트장. 콘서트가 절정을 향할 때, 리더격인 미마가 갑자기 독립선언을 한다. 아이돌 스타에서 ‘졸업’한 미마는 화려한 여배우에 대한 꿈을 품는다.

챠무를 탈퇴한 미마의 첫 일은 TV드라마 ‘더블 바인드’에 출연하는 것. 이제 그녀는 혼자다. 요정 같은 의상과 깜찍한 멜로디의 후광 없이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극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녀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드라마에서 수위 높은 강간 신을 연기하고, 거기에 맞춰 누드 사진도 공개한다. 그래서 그녀는 “연기자라면 이쯤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여배우로서 지명도는 점점 높아가지만, 주변의 급격한 변화에 그녀의 정신을 황폐해져 간다. 그런 와중에 미마의 일과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 둘 살해되기 시작한다.

기실 이 같은 현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인형의 집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외모와, 멜로디나 가사 따윈 별반 중요하지 않은 따라 부르기 좋은 노래, 그리고 본인보다는 소속사의 뜻에 따라 활동의 방향이 결정되는 아이돌 스타의 모습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성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택하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보다 현실 같은 스토리에서 감독은 붕괴돼 가는 소녀의 자아를 인터넷을 통한 가상현실·자아분열·다중인격이라는 텍스트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는 극 중후반부로 가면 더욱 극명해진다.

강간 신을 찍고 돌아와 자신이 키우던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려는 미마는 그 물고기들이 죽어있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잖아. 모두에게 피해를 줄 수 없어”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동시에 나타난 자신의 다른 자아는 “넌 더럽혀졌어. 너가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니잖아. 넌 아이돌이야”라고 웃으며 유유히 밤거리를 떠돈다.

특히 자신의 누드를 찍은 카메라 감독을 살해하는 장면은 미마가 직접 살인을 하는지 인격이 치환된 매니져 루미가 벌이는 행위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 감독은 다중인격·자아분열·인격치환 등 신경증을 통해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 자신이 진짜인지, 환상인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는다.

불교와 정신분석은 모두 인간 존재를 결핍된 주체라고 가정한다. 이처럼 정신분석과 종교는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신경증에 대해서 대화를 통해서 치료한다. 이 치료 과정 중에는 주체인 자신을 진정으로 알게 하는 ‘탈주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주체의 형성 과정을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나뉘어 설명한다. 상상계·상징계·실재계는 모두 개인의 심적 현실을 표현하는 범부로서 서로 연결돼 있고, 하나가 분리되면 나머지도 자연스럽게 연결고리가 풀어진다. 라캉은 자아의 주체는 연결고리를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불교의 자아 인식도 마찬가지다. 불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의식과 감정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불변적인 자아개념을 부정한다. 불교의 자아는 색·수·상·행·식 등 오온(五蘊)으로 이뤄진 덩어리다. 이런 오온에 의해 상정된 주체는 여러가지 요소들의 관계 즉, 연기법(緣起法) 속에서 발생하며 고정될 수 없는 자아다. 오온에 의해 주체는 해체될 뿐만 아니라 ‘무아(無我)’가 된다.

소위 오타쿠이자 스토커인 미마니아의 방 모습. 그는 이곳에서 오직 인터넷과 미마의 존재를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그는 관음증의 가해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허깨비 놀음의 피해자가 된다.

결국 〈퍼펙트 블루〉의 아이돌 가수 미마·매니져 루미·스토커 미마니아는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의 거울들이다. 미마는 타인의 시선에서, 루미와 미마니아는 미마에게서 자신의 본질을 엿본다.

실제‘미마의 방’을 운영하고 일기를 올렸던 미마는 바로 루미였던 것이 밝혀진다. 자신을 미마라고 생각하는 루미가 무대 의상을 입고 주인공 미마를 죽이려는 장면은 마치 ‘도플 갱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섬뜩하다.

실제 서로를 타자화 시키고 스스로를 고독으로 몰아가는 현대인과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간군상들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오늘도 ‘나’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사람들 대하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집착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번뇌하는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매니져 병문안을 온 마미는 돌아가는 차에서 웃으며 “내가 진짜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정한 자아를 찾았다고 볼 수 있을까. 화려한 ‘타자’로 ‘외로운 섬’으로 살아갈 그녀의 인생이. 아니 우리네 인생도.
신중일 기자 bono98@jubul.co.kr

주인공 미마가 자신의 누드를 찍은 카메라 감독을 살해하는 장면. 이 역시 현실인지 환영인지 모르는 시퀀스 중 하나다.

“1초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어째서
동일인이란 걸 안다고 생각해?
단지 기억의 연속성.
그것만에 기대어 우리들은 일관된
자기동일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어.”
작품 속 TV드라마 ‘더블바인드’ 대사 中

Copyright ⓒ 주간불교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