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76.05.28 17:48 발행
이방인들 도심서 ‘ Who am I’ 화두 들다
현장르포-외국인 템플라이프를 가다
다도·참선·연꽃만들기 체험 통해
속세에 묻힌 마음때 훌훌 털어내
청아한 풍경소리에 마음속의 찌꺼기를 정화하고, 시끌벅적한 세상 속의 나는 잠시 풀어 헤쳐도 좋다. 매주 목요일 푸른 눈의 이방인들은 서울 강남의 도심 한복판 산사에서 이를 맛볼 수 있다. 나른한 오후 이국땅에서 외국인들이 ‘참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봉은사 템플라이프를 함께했다.
7월 30일 오후 2시 서울 봉은사 진여문 앞. 속(俗)과 승(僧)의 경계였다. 시끌벅적한 길 건너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벽안(碧眼)의 이방인부터 사리(Sari, 인도전통의상)를 입고, 금빛 머리카락 등을 지닌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40여명이었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봉은사에서 열리는 외국인을 위한 템플라이프 ‘Who am I’ 체험을 위해 모였다.
지난 2002년 첫발을 내딛은 이 행사는 외국인들에게 나를 바로 보고 깨울 수 있는 템플스테이의 축약형이라 할 수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참나를 만나러 가는 설레임 뿐만 아니라 다도, 연꽃만들기 등 불교전통문화를 직접 접할 수 있어 참가자들의 호응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상혁 사무관은 “1년간 약 6~7천여명의 외국인이 다녀가는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 상품 중 하나”라며 “지속적인 수정·보완을 통해 더욱 발전된 프로그램을 선보일 것”이라고 전했다.
진여(眞如)문 아래서 사천왕상 설명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리는 화두를 앉은 참가자들은 부도탑을 지나 종루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낮의 뜨거운 볕에 점차 일그러지던 그들의 얼굴은 “사물 소리는 삼라만상을 깨우고 온 중생을 구제하는 일인데 우리들도 이 소리를 빌어 현명한 눈을 떠야 한다”는 자원봉사자의 설명에 조금 펴졌다.
초반 약간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법왕루 참배를 통해 씻겨 내려갔다. 참가자들은 어설픈 자세지만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잠시 법당에 앉았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그들을 휘감았다. 사바세계의 나를 흔들어 깨우는 듯한 청아한 소리에 법왕루를 나서는 외국인들의 몸가짐과 마음은 단정해졌다.
불교문화에 관심은 많았지만 접할 기회가 없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일본인 마사꼬(27)씨는 “기복을 위해 절을 찾는 줄 알았었는데 법당에 앉아 정적을 느끼며 절하고 참선하는 사람들을 보니 불교가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종교인 것 같다”고 말했다.
부처님 일대기와 심우도가 그려진 대웅전 뒤편에서 이날의 자원봉사자 어르신은 참가자들에게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는 부처님 가르침을 설명했다.
봉사자가 이름을 알려야 할 필요가 없다던 63세의 봉사자 어르신은 “봉은사 내 전각 소개보다도 경내를 둘러보며 불교의 핵심 사상을 외국인들에게 전달하는게 봉사자의 일 같다”면서 “이에 대한 반응이 좋으면 참 뿌듯하다”고 전했다.
오후 3시 봉은사 뒤편 수련원. 다도체험이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와 불가와 인연은 깊다. 차는 향, 등, 꽃, 과일, 쌀과 함께 육법공양(六法供養) 중의 하나이다.
또 단순히 차를 마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수행과 마찬가지로 자기완성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는 다도를 통해 6근(안이비설신의,眼耳卑舌身意), 즉 눈, 귀, 코, 혀, 몸과 생각을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몸과 마음이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다도체험이 조용히 차를 음미하고 자신의 내면을 뒤돌아보는 시간을 보낼거라는 생각은 이곳 프로그램에선 통하지 않는다. 딱딱한 불교전통문화체험을 넘어 외국인들의 취향과 기호를 고려한 담소의 장이 이 시간에 열린다. 자기소개부터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여기 왔는지 등 자유로운 대화가 오고간다.
목동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는 가브리엘라(25)는 캐나다 출신이다. 그는 “출퇴근 시간과 맞지 않아 이 체험을 그간 못했었는데 오늘 하게 됐다”면서 “편안하고 딱딱하지 않은 분위기가 참 좋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다리가 길어 가부좌를 틀고 앉기 불편한 참선시간이 외국인들에겐 가장 고통스럽다. 하지만 ‘Who am I’의 대답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다리를 꼬고 앉은 참가자들은 지긋이 코끝을 보며 자신들의 들숨과 날숨에 집중했다.
참선진행을 맡은 봉사자는 조용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참가자들에게 화두를 던졌다. “숨소리에 집중 하면 필요 없는 것에 집착했던 내 마음을 버릴 수 있습니다. 모든 세상의 현상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마음이 자기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럽연합 후원으로 한국에서 최고경영과정을 밟고 있는 샤르카(37)의 참선 자세는 어느 한 부분 흠 잡을데가 없었다. 5년 전 처음 불교를 접한 그는 참선도중 무슨생각을 했냐는 질문에 “잡념을 없애고 아무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답했다.
나이·성별을 떠나 연꽃등을 만드는 모든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연잎을 컵에 붙이며 참가자들은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의 처렴상정(處染常淨)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연꽃만들기 진행자 조미제(47)씨는 “참가자들이 ‘왜 내가 이것을 만드는지’ 알게 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포교”이라며 “포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고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어머니와 아들, 아내와 함께 인도에서 온 샴(43)씨는 “바쁜 일상에 치이지 않고 이렇게 고즈넉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가족들과 함께 삶의 한때를 즐길 수 있어 참 좋았다”며 “오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음의 때를 조금 씻어낼 수 있었다”고 즐거워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산문 밖을 나섰다.
김도원 기자 kdw8321@jubul.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