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전>은 초의(草衣)의 저서가 아니다. 초의는 1828년(43세)에 지리산 칠불선원에서 중국의 풍물을 기록한 백과사전 비슷한 종류의 <만보전서(萬寶全書)>중에서<경당증정만보전서(敬堂增訂萬寶全書)>14권의 일부 내용인<채다론(採茶論)>을 베끼기 시작하여 1830년(45세)에 <다신전>이라는 제목을 달아 완성했다. 모환문(毛煥文)이 쓴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있는<채다론>은 명나라 장원(張源)이 1595년경에 저술한 <다록(茶錄)>을 필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신전>의 최종 원본은 장원의<다록>이다.
초의의 저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신전>이라는 제목을 그대로 붙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초의는 그 시대 차 역사의 중심인물이다. 그 자신 스스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기보다는 사대부들과 차를 매개로 한 교류에 의해 차 역사의 중심인물이 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어떤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이 될 경우 한 사람의 사생활은 그 자체가 바로 역사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차에 관한 그의 동선을 꼼꼼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만보전서(萬寶全書)>를 필사하게 된 것은 답답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초의의 답답함이 이 시대 필자에게도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를 다루는 방법에 대한 관습의 답답함을 벗어나는 변화는 아주 느렸거나 정체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개선의 인식을 했다고 해서 겨우 약용으로 쓰는 정도의 차를, 생존의 절박한 수단도 아닌데 초의에 뜻에 맞게 다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처한 기술 인식과 차를 다루는 문화정도를 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다른 나라의 고서(古書)들을 살펴보면 차에 대한 시대적 인식이 우리와 중국과는 약 300년 정도, 산업적 측면에서 일본과는 약 100년 정도 차이가 나는 듯하다. 초의를 활용하여 연구의 방향을 자각할 기회를 갖고 싶고 관심 있는 독자들과 차에 대한 보다 높은 관심을 나누고 싶었다. 가감 없이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는 계기로 삼고 좀더 나은 성장의 발판으로 활용하고 싶어 <다신전>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초의가 <다신전>을 쓰게 된 경위
戊(무)子(자)雨(우)際(제)
무자년(1828년) 비오는 날
隨(수)師(사)於(어)方(방)丈(장)山(산) 七(칠)佛(불)啞(아)院(원)
스승을 따라 지리산 칠불암 아자방에 갔다가
謄(등)抄(초)下(하)來(래) 更(갱)欲(욕)正(정)書(서)
(다신전을) 옮겨 베껴쓰고 내려온 이후 다시 바로 쓰려고 했으나
而(이)因(인)病(병)未(미)果(과)
병이 들어 이루지 못했다.
修(수)洪(홍)沙(사)彌(미) 時(시)在(재)侍(시)者(자)房(방)
수홍사미가 당시 시자방에 있을 때,
欲(욕)知(지)茶(다)道(도)正(정)抄(초) 亦(역)病(병)未(미)終(종)
그가 다도를 알고자 해서 정서로 베끼는데 역시 그도 병이 나서 마치지 못했다.
故(고)禪(선)餘(여)强(강)命(명)管(관)城(성)子(자)成(성)終(종)
그래서 좌선하고 남은 시간에 억지로 관성자(붓)를 시켜 마무리를 지었다.
有(유)始(시)有(유)終(종) 何(하)獨(독)君(군)子(자)爲(위)之(지)
시작을 했으면 끝을 맺는 것은 어찌 군자들만 행하는 일이겠는가.
叢(총)林(림)或(혹)有(유)趙(조)州(주)風(풍)
총림에서도 조주의 다풍이 있기는 하지만
而(이)盡(진)不(부)知(지)茶(다)道(:도)
모두가 다도를 알지 못한다.
故(고)抄(초)示(시)可(가)畏(외)
그러므로 베껴서 후진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庚(경)寅(인)中(중)春(춘) 休(휴)菴(암)病(병)禪(선)
경인년(1830년) 중춘(음력 2월)에 암자에서 쉬는 병든 선승이
雪(설)窓(창)擁(옹)爐(로) 謹(근)書(서)
눈 오는 창가에서 화로를 안고 삼가 쓰다.
한국차심평원 원장 한유미
*꼭 필요한 주석이 아니면 지면상 생략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다신전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