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 평생 짊어질 숙원”
영화·뮤지컬·콘서트 등 제 2 전성기 구가
법정스님 가르침 20년 밑모를 감동 솟구쳐
"돈이나 갖은 물신에 집착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
언제든 우리들의 잃어버린 감수성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생동감어린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짧은 머리에 해맑은 미소, 가요계의 작은 거인 김수철 씨는 그 풍모에서부터 연예인하면 으레 갖는 각종 편견을 보기 좋게 불식시켰다. 그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푸근했고 정겨웠으며 놀라울 정도로 소탈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매력은 여기에서 그치질 않는다. 환한 미소와 선한 눈동자 이면에는 아직 스튜디오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곡들에 대한 사춘기 소년과도 같은 열정이 어릿어릿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는 작곡가 김수철 씨의 녹음작업이 한창이었다. 그가 현재 맡고 있는 프로젝트는 마산 MBC가 제작한 ‘팔만대장경 특별5부작’의 주제음악.
팔만대장경과 그는 이미 예전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98년 음반 〈팔만대장경〉 발매 이후 그는 지속적으로 팔만대장경의 후속앨범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열정이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으면서 이번 특별기획프로그램에서도 그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요청해온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제가 남은 일생동안 물고 늘어질 숙원의 작업입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불교의 정수이기도 하지만 종교를 초월해 전 인류의 보물이니까요. 팔만대장경을 음악으로 옮기는 동안 저는 항상 부처님이 제 주위를 외호하는 듯한 깊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그런 안정감은 다른 음악작업을 할 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됩니다. 어떤 발상이랄까, 사고의 확장 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늘 제게 푸근한 충만감을 선사하지요.”
작곡가 김수철 씨는 지인들 사이에서도 유독 일욕심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는 올해 만에도 25년만의 단독콘서트(4월)·7080인기가수 합동콘서트(7월)·광복60주년 특별공연(8월)·광주국제영화제 영상퍼포먼스 지휘(8월)·뮤지컬 ‘나, 심청’의 무용음악 작곡(9월) 등 하루도 제대로 쉴 틈 없는 일의 강행군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런 그가 여타 중요한 프로젝트를 일단 뒤로 미루고 팔만대장경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의 주제음악을 선택한 데는 불교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 때문일 것이다.
김씨와 불교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다. 그는 카톨릭 집안에서 태어났고 학창시절만 해도 성당에 나갔다. 하지만 음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종교에 대한 관심보다는 각종 음악적 실험에 빠져 들었다. 그런 그가 1998년 팔만대장경을 음반으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불교는 그의 허전한 내면을 강타했다.
그는 음반 〈팔만대장경〉을 위해 그토록 좋아하던 술과 담배를 일체 끊고(당시 이후로 지금껏 줄곧 끊어옴) 해인사에서 수 주간 기식하며 해인사 학인스님들을 통해 불법에 귀의하는 성직자의 모습이 얼마나 참되고 아름다운지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이 보고 느낀 팔만대장경의 정수를 음악으로 정제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음악인생을 통틀어 가장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된다.
“제가 느낀 부처님의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작곡인 것처럼, 누구든 자신에게 주어진 어떤 일과 사명을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줄 알고, 속악하고 추악한 일들을 멀리하는 것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에 충실한 삶이라는 것을 말이죠. 저는 돈이나 각종 물신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제 음악을 오히려 병들게 하죠. 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김씨에게는 가슴깊이 흠모하는 스승이 있다. 《무소유》의 법정스님이 바로 그 스승이다.
김씨와 법정스님과의 인연은 벌써 20여년을 바라볼 정도로 오래됐다. 그는 86년 한 국악관현악단의 연주자로 초빙돼 지방을 순회하던 중 연주회에 참석한 법정스님을 만났고, 해마다 틈나는 대로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문안인사를 갈 정도로 스님을 흠모했다고 한다. 법정스님 역시 김 씨가 작곡한 ‘황천길’과 같은 음반을 무척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김 씨는 지금도 가뭄에 단비를 구하듯 종종 법정스님의 저서를 정독한다고 한다.
법정스님 외에도 김씨는 팔만대장경연구소 소장 종림스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종림스님은 팔만대장경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된 직후부터 팔만대장경을 음악으로 옮기는 작업을 김 씨에게 처음으로 의뢰했다. 이후 종림스님과 그는 서로 격의 없이 대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는 법정스님과 종림스님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다는 것, 사람해치지 말고, 함께 나누는 미덕을 깨달고 살라는 것 등과 같이 단순한 것부터 실천하며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머리로 아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동자승처럼 순수한 표정과 마음을 간직한 작곡가 김수철.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영화음악의 신기원을 이룩한 천재작곡가·한국 가요의 산증인·영원한 작은 거인 등과 같은 수식을 굳이 생략하더라도 어느 누구든 그의 해사한 미소와 촉촉한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음악과 삶에 대한 활화산처럼 솟구치는 열정에 얼마간 넋을 잃게 될 것이다. 국보(國寶)와도 같은 이 만년청춘 작곡가에게 언제나 부처님의 자비가 그득하길 기원한다.
글: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사진: 이한규 업무국장 lhk0108@jub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