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세훈 | 2006/01/20 13:43

세월의 완강한 흐름앞에
본래면목 자리 어디인가


‘소설의 지평은 과연 어디까지일까?’
소설가 김인숙이 지난해 발표한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을 읽고 있노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녀의 소설에는 흔히 말하는
소설적 서사, 혹은 허구에 대한 강박, 그에 대한 일련의 판타지 등이 없다.
그녀는 흡사 제례를 준비하는 아낙네처럼
현실의 오브제들을 있는 그대로 정성껏 다듬어갈 따름이다.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에 소개된 단편 〈숨은 샘〉은 전라남도 구례의 천은사(泉隱寺, 주지 금종)에서 제목의 모티프를 빌려 온 작품이다. ‘샘이 숨은 절’이라는 뜻의 사찰명을 가진 천은사의 설화처럼 단편 〈숨은 샘〉의 인물들 역시 세월의 도저한 흐름에도 좀처럼 변하지 않는 추억이 있다.

그 추억은 흡사 첫사랑의 아련함을 닮기도 했고, 일생을 두고 한 두어 번쯤 경험할 법한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일수도 있고, 사그라진 청춘의 틈에 마냥 끼어두고픈 미화된 환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주인공화자 '나'에게 있어 20여 년 만에 재회한 대학동창 '이영호'란 존재는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우는 제재인 동시에 세상에 대한 자기방어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 비릿한 남성성을 사유케 하는 상관물인 셈이다.

〈숨은 샘〉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작가인 ‘나’는 잡지에 지방 유적지를 기행하는 글을 쓸 요량으로 어느 더운 여름날 우연히 구례행 고속버스에 오른다. 그런데 바로 옆자리엔 ‘어린애처럼 사탕을 까먹는 살찐 남자’가 앉아 그녀의 심기를 거슬린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대학동창 ‘이영호’였다.
20여 년 만에 상봉한 영호의 모습에는 예전의 그 날쌔고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그저 살찌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철없어 보이는 중년 남자이다. 암울한 80년대, 영호는 데모로 술렁이는 컴퍼스에서도 오직 고시공부에만 전념하는 그야말로 뻔뻔한 모범생이었다. 그런 영호였지만 20년 만에 만난 그는 보험외판원으로 전락한 신세. 주인공 ‘나’는 선뜻 그와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없는데….

학창시절 소위 얄미운 모범생에 불과했던 이영호는 세월의 흐름 앞에 초라하게 나동그라져 보인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이영호는 이런 자신의 처지에 별 느낌이 없는 듯 하다. 그는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몸임에도 옛 동창에게 천진하게 아는 체를 할 수 있는 만년소년인 셈이다. 그에 반해 ‘나’는 세월의 때가 좀 더 많이 묻은 의심많은 ‘어른’이었다.
서로 단편적인 추억을 나눈 사이임에도 영호를 기억하는 ‘나’의 방식과 영호가 ‘나’를 기억하는 방식에는 뭔가 미심쩍은 것들로 넘친다. 둘 사이의 이런 이상한 기류는 과연 첫사랑의 그것이었을까? 그 해답은 알 수 없다. 작가는 이 모호하고 아스라한 추억을 차분히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같은 작가인 화자 ‘나’역시 영호를 관조할 뿐이지 다가가 융화되진 않는다.
즉 중년의 영호를 통해 과거의 영호를 소급해가는 과정의 그 나긋나긋하고 촘촘한 묘사들은 결국 영호를 기억하는 ‘나’의 상념으로 귀결되고 있다. 화자인 내가 보기에 영호는 홀어머니에 여동생을 먹여 살려야 했던 슬픈 청년가장이었고, 인생의 어느 한순간 보기 좋게 비상해본 적이 없는 낙오자였다. 즉 그는 사회의 비극(80년 군사독재상황 등)을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비극(가난과 가장이란 허울 등)조차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일 뿐인 것이다.
이런 영호의 모습은 언젠가 천은사에서 보았던 한 마리 새의 모습과 자연스레 연계된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음에도 날기를 거부하듯 부처님의 뒤로 숨어버리는 새의 그것과 마주한 한 쌍의 데칼코마니(轉寫法)로서 말이다.
도약하면서도 착지할 수밖에 없는 혹은 날기를 희망하면서도 추락할 수밖에 없는 신화 속 이카루스처럼 영호의 이상과 실존의 간극은 그렇게 멀기만 하다.

“어머나, 저 새 좀 봐.”
불전에서 날아다니는 새가 하도 신기해 나도 모르는 사이 중얼거리는데, 마치 내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새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새는 누군가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경계라도 하듯이, 대들보 위에서 총총 뛰어 불상의 머리 뒤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누구도 그 새를 잡기 위해 그 불당 안으로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니, 새에게는 그곳이 안전한 세상의 전부일지도 몰랐다. 하기야 새가 반드시 창공을 날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가치기준에 따른 것이다. 영호를 한때나마 가슴에 담아두었던 ‘나’의 본심 속 영호는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해피엔딩’을 품고 사는 동화속 주인공이었고,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하는 멀리뛰기조차 우아한 춤으로 보이게끔 하는 미소년이었고, 고시를 여러 번 포기하고 어렵게 들어간 회사임에도 소신껏 노동운동을 했던 낭만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나는 왜 영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잔인한 세월 앞에 변해버린 영호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영호는 ‘나’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존재로, 또한 ‘훼손되지 않은 채, 혹은 못한 채 아예 종신이 되어버린’ 추억의 일부로만 남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영호라는 상관물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나’자신의 남루한 현실에 화자 스스로도 얼마간 경악한 것이리라. 그래서일까? 영호의 모친상 소식을 친구 남창호를 통해 듣고 구례로 내려갔음에도 영호에게가 아닌 천은사로 발길을 돌려버린 것이다.

아마도 나는 세월의 흔적들을 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의 장면들을 비로소 편안한 마음으로 되돌이키게 된 것 역시 천은사에서였다. (중략)
공원에서 기우뚱한 자세로 착지를 한 그가 나를 향해 웃어 보였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은 훼손되지 않은 채, 혹은 못한 채 아예 ‘종신’이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혹은 훼손조차 기억이 된다는 걸… 그리하여 기억은 때묻고 더럽혀진 채로 쌓여 가는 것이다. 모든 추한 꼴을 다 견디고 나서야 마침내 다가오는 생의 끝, 해피엔딩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와 나는 아직 그 끝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이렇듯 충동적으로,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에서는 ‘세월의 흔적들을 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향한 천은사에서 그녀는 생의 아릿한 경지를 되새기고 추억을 추억으로써만 묻어버리는 길을 택한다. 그녀는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예전의 형상 그대로 봉인하고픈 추억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훼손하고 싶지 않은 순수의 일종이리라.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 작가인터뷰

“봉원사, 정감 넘치는 유년의 뜰”

소설가 김인숙은 다소 역마살이 있는 작가이다. 호주·중국 등지에서 이민 아닌 이민생활을 했었고 다시 한국에 정착한 지금도 틈만나면 홀홀 단신 여행가방을 챙겨 어딘가로 떠날 기세이니 단정하고 맑은 사유가 묻어나는 문체와 달리 무척 호방한(?) 성격을 타고 난 셈이다.
그녀의 종교편력 역시 다양하다. 어린 시절에는 불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서울 신촌 봉원사를 즐겨 찾았고, 학창시절에는 기독교·천주교에도 얼마간 호감을 가졌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종교간 허울을 스스로 헐어버리고 모든 종교를 긍정적으로 관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불교에 많은 애착을 느낀다고 한다. 다른 작가의 작품제목 〈유년의 뜰〉을 빌어 표현하면, 신촌 봉원사는 그녀에게 아련하면서도 충만한 온기가 전해지는 ‘유년의 뜰’이었던 셈이다.
소설가 김인숙은 언젠가부터 거시담론이 맥을 못 추리게 된 문학계에서 신경숙·전경린·하성란 등과 더불어 여성주의 문학 혹은 미시담론의 향연을 연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초창기 그녀의 소설들은 다른 여성작가군들에 비해 다소 심심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옛 속담에 이르길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그녀의 소설은 읽으면 읽을수록 그 잔잔한 리얼리즘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그런 경지는 매우 낯설고도 신비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소설집 《그 여자의 자서전》의 단편들도 그런 맥락에서 그녀 개인의 놀라운 성취를 넘어 한국단편문학의 보석으로 오래도록 빛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작가이력
소설가 김인숙

1963년 서울 출생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198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상실의 계절〉로 등단
1995년 장편 《먼길》로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2000년 소설집 《개교기념일》로 현대문학상 수상
2003년 중편 〈바다와 나비〉로 이상문학상 수상

장세훈 기자 xsatin@jub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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