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렌즈속에 담은 사하촌

-서울 돈암동 흥천사 사하촌을 가다 

서울 삼각산 능선을 따라 고지대에 형성된 성북구 일대는 6.25 사변 당시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명인사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미아리 고개를 넘어 북한으로 납치되어 넘어간 아픔 역사를 안고 있다.
당시 북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와 양민들이 이 고개에서 흘린 눈물이 정릉천을 타고 한강까지 흘러갔다고 하니 그들의 원통함과 고통은 지금의 후손들이야 미루어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6.25사변 후에도 미아리 고개(돈암동-길음동)에 얽힌 갖가지 사연이 얼마나 많으면 이러한 내용을 담은 대중가요가 발표될 정도였다. 아직도 국민들이 즐겨 부르는 애창곡‘단장의 미아리고개’가 그 실례다.
성북구에는 미아리 고개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에서 따온 아리랑 고개가 자리하고 있다. 복개한 성북천(안감천)을 동서로 지나는 아리랑고갯길은 좁고 구불구불한 고개로1935년 일본인들이 정릉일대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곳에다 요정을 꾸며놓고 고갯마루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푯말을 세운 데서 유래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인들이 세웠다는 이정표와 요정은 흔적이 없고 흥천사(신흥사) 오르는 아리랑 길 양옆으로 작은 돌무더기만이 이끼에 둘러진 채 무심한 세월을 달래고 있다.
아리랑 길 가난의 흔적만 남아 5월의 붉은 철쭉이 산허리를 휘감아 길손을 유혹하는 꽃 대궐. 돈암동 흥천사(신흥사)를 가기 위해 아리랑 고개를 오르는 길옆으로는 부처님오신날을 찬탄하는 오색연등이 하늬바람을 타고 꽃비를 내린다.
8년 전 이곳을 서너 번 다녀간 기억을 떠올리며 혹시 있을지 모를 ‘대명각’을 찾아보았지만 잡초만 무성한 채 가야금과 장구소리는 들리지가 않는다. 회갑을 맞은 장안의 어르신들이 하루종일 음식과 가무를 즐기며 삶의 희로애락을 풀어놓던 곳으로 지금은 마을버스 종점이 들어서 달동네를 오고가는 주민들을 실어 나르고 있다.
1970∼1980년대 서울의 유명한 달동네였던 이곳은 개발의 상징인 아파트 군락을 이룬지 몇해 되지 않는다.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이들 대부분의 아파트 단지는 아직 미개발된 달동네를 향해 비웃기라도 하듯 당당하게 서 있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속에 아직 어디엔가 남아 있을 법한 사하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것은 흥천사 주변지역이 대부분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돼 한창 아파트 공사 중이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이곳에서 30년을 넘게 산 터줏대감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이 터줏대감 역시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사찰에 등을 달러 나온 길이었다. 김복례(76) 할머니는 1960∼1970년 당시에는 신흥사 입구 주변으로 달동네가 오밀조밀하게 늘어섰고, 또 사찰에서 일하는 공양주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공양주 일을 하던 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남은 자식들 마저 뿔뿔이 흩어져 그들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양손을 심하게 떠시는 김 할머니를 붙잡고 사하촌을 얘기를 듣기란 더 이상 무리였다. 하는 수 없이 흥천사 주지스님을 찾았지만 부임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스님께서는 동네 통장을 소개시켜 주셨다. 6통 통장인 김성만 씨 역시 흥천사 사하촌 얘기는 본인보다는 3동에 있는 박 할머니가 더 잘 알고 있다며 그리로 가보란다. 또 다시 박 할머니를 기다리기를 서너시간. 답답한 마음에 이웃집에 물어보니까 어제 입원했다고 전한다.
낙담한 채 발길을 돌리는 순간 저쪽 골목어귀에서 할아버지 한 분이 그 할머니는 왜 찾느냐고 넌지시 물어온다. 사정 얘기를 하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까운 구멍가게로 가자며 손짓을 한다. 김성구(85) 옹은 1960년대 흥천사 입구에서 찐빵을 팔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사찰규모가 서울 장안에서 손꼽을 정도로 컸다며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흥천사 입구 앞쪽으로 작은 도랑이 흘렀고 아랫동네 친구녀석들이 하루종일 가재를 잡느라고 부산을 떨었단다. 이곳에서 만난 집사람과 결혼한 얘기를 먼저 꺼낸 김성구 옹은 가난한 집의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흥천사에 가끔 들러 장작을 패는 일을 도왔고 모친은 사찰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엌일을 거들었다. 이 당시에는 모친말고도 서너명의 동네아주머니들이 사찰에 적을 두고 공양주 일을 했지만 지난해 보명 할머니를 끝으로 모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집이라고는 움막집이나 판자집이 전부였다는 김성구 옹은 미군들이 먹던 소세지나 맥주 캔을 이용해 양철집을 지었다며 옛날 일을 잠시 회상했다. 옷과 음식은 흥천사에서 광목을 얻어 해결했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누룽지를 얻어와 큰 가마솥에 넣고 죽을 끓여 먹었다. 그는 지금도 잊지 못하는 스님 한 분이 있다. 열반하신 성문스님이 이맘때면 생각나 남몰래 눈물을 흘리곤 한다.
사찰 인근 주민들이 대부분 어려운 살림살이에 자식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킨다는 것은 엄두를 못낼 정도였다. 성문스님은 이런 애들을 사찰로 불러들여 한글과 한문을 가르쳤다. 학용품에서 애들 가방까지 스님께서 직접 챙기셨다. 스님이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야학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인근 고려대생들과 주민들에게 알려지자 야학을 돕겠다는 후원자들이 늘어났다. 야학을 하는 어린이들 중에는 부모들 대부분이 등짐이나 하루품팔이로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물론 사찰주변 요정집이나 큰 식당의 자식들은 이들과 달랐다. 옷과 신발, 먹는 것부터 가난한 집 애들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다 보니 사하촌 애들사이 부촌의 애들과 간간이 전쟁이 벌어졌다. 한마디로 자존심 싸움이었다.
김성구 옹은 역시 이들과 싸운 무용담을 껄껄껄 웃으며 털어놨다.
“그놈들은 운동화를 신었지만 우린 검정고무신을 신었죠. 그래서 그 놈들이 우릴보고 흑전사라고 놀렸죠. 산에서 꺽은 나무를 잘라 칼과 활을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아주 신나게 패줬죠.”
나중에는 애들싸움이 어른싸움으로 번져 요정이나 식당에 일하는 부모들이 쫓겨나는 일도 생겼다. 반목과 갈등이 애들과 어른사이에도 이어졌지만, 부처님오신날은 온 동네 전체가 잔치였다. 이날만큼은 흥천사 뒷산에 멍석을 깔고 성문스님과 함께 흥겨운 놀이를 하는 등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마을버스 종점을 중심으로 산 아래는 부촌 그 위쪽으로는 빈촌으로 불렸다. 또한 흥천사 뒷산 너머에는 또 다른 사하촌이 형성돼 있었다. 아직도 흥천사 너머에는 달동네가 고스란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올 가을쯤이면 공사에 들어간다.
장안 회갑잔치의 절반을 이곳 신흥사 입구 요정집에서 치를 정도로 명성히 자자했다는 김성구 옹의 말을 뒤로하고 빗길을 나섰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에 어디선가 장구의 선율에 따라 구성진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니…”  이재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