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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가난은 멨지만 포근한 인정 묻어나

서울 비구니 사찰 청룡사와 보문사 사하촌
이재우 | 2003/10/04 16:59

등에 가난은 멨지만 포근한 인정 묻어나



단종비의 애환이 서린 청룡사



낙산은 일제시대 때만 해도 송림이 우거진 명산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은 낙산일대가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다. 동대문에서 창신동을 거져 숭인동 쪽으로 가파른 길을 오르다 보면 단종비인 정순왕후 송씨가 한 평생 부군을 기다리며 쓸쓸히 임종을 맞은 청룡사를 만날 수 있다.



청룡사는 서울도심 비구니 사찰인 옥수동-미타사, 숭인동-청룡사·청량리-청량사·보문산-보문사 등 4승방 중의 하나로 도선국사가 터를 잡은 명찰로 사찰 창건 당시부터 비구니스님들이 주석해오고 있는 도량이다. 비구니 혜원스님이 이곳에 주석하며 후학을 가르친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룡사 길 건너편 야트막한 산봉우리는 단종비가 영월로 유배를 떠난 단종의 애틋함을 못 잊어 자주 오르내린 곳으로 일명 ‘동망봉(東望峰)이라 불린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야트막이 솟아오른 자주봉은 단종비가 우물가에서 끝동에 자주물을 자주 들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시대에는 청룡사가 자주동·영이정 절이라고 불리었지만 지금은 단종비의 애절환 사연만을 간직한 망부석만이 덩그라니 놓여있다.



그 옛날 사찰 경내지가 6천여 평에 달하는 어마마한 사격을 가진 청룡사가 재개발 붐을 타고 지금은 몇몇 당우만 남겨진 채 비구니 도량으로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청룡사 사하촌은 이러한 비구니 도량과 함께 산 비탈을 따라 무허가 판자집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곳에 사하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6.25사변이 끝난 직후부터다. 산비탈을 따라 계단식으로 만든 밭에 함석으로 엮은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자연스럽게 오솔길이 형성된 것이 바로 낙산 길이며 등 너머부터는 보문사 길이다.



청룡사 주지 진우스님은 “사찰에서 재를 올리기 위해 장을 보러 나가면 종로 5가에서부터 이곳까지 줄곧 봇짐을 지고 올라왔다”며 “머리에 이고지고 하다 보면 하루해가 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곳에서 만난 최순남 보살(73세)은 당시 동망봉 아래는 하늘이 훤히 보이는 집들이 고물을 팔아 하루하루 먹고살았다며 동대문과 청계천에 나가 날품을 파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고 말한다.



최보살은 당시 오솔길 옆으로 작은 개천이 흘러 이곳 사하촌 식구들은 빨래와 목욕을 이곳에서 해결했다며 아랫동네 창신동 주민들이 구정물에 밥을 못해먹겠다는 투정을 부리곤 했다며 웃는다. 아직도 이곳 숭인 2동 주민들은 그 옛날 청룡사 비구니스님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있다.


돌담에 가린 청정도량 보문사


청룡사 뒷길을 따라 보문사 길로 내려서면 성북동이 훤히 드러나 보인다. 좌측으로는 한성대학교가 있고 그 옆쪽으로는 성곽이 수풀에 가린 채 조선조 5백년 역사를 말없이 둘러치고 앉았다.



오후에 따가운 햇살이 돌담을 비친다. 보문사 사하촌은 일주문 좌측 비탈진 곳에서 자리잡고 있다. 좁은 미로의 골목길을 따라 들어 선 이곳에는 재개발이 한창이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나고 이주해 간 집들에는 고양이가 객을 반긴다.



이곳에서 동망세탁소를 운영하는 정씨는 “보문사 사하촌은 등너머 청룡사 사하촌과 별반 다를게 없습니다. 그곳 사하촌이 포화 상태가 되다보니 이곳으로 넘어와 많이들 살았다”며 “이곳 사하촌 식구들이 돈을 벌기위해 보문사 길을 따라 낙산을 오르내렸다”며 “제가 어릴때는 그곳 애들과 전쟁놀이도 많이했다”고 말했다. 보문사 돌담이 생긴 것은 숲을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6.25사변 직후 이곳 사하촌 식구들은 닥치는대로 소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해 민둥산이 될 뻔했단다. 지금은 이곳 주민들이 옛 성곽을 복원하고 시민공원을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성북구청에서 공원조성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문사 일주문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나서면 신설동 사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보문로를 만나게 된다. 옛날 이 길은 우마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소로였다. 지금은 길 양옆으로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 숨이 막힌다.



종로 유기장사와 박물장사들이 이곳에서 자주 좌판을 펼친 것도 사찰을 찾는 불자들이 전부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작은 개천 둑방을 따라 팥죽·국밥집과 한두군데 불교용품점이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는 견디지 못하고 전부 조계사 인근으로 가게를 옮겼단다. 비록 가난을 등에 메고 살았지만 이웃의 정은 지금도 넘쳐난다는 것이 이곳 주민들의 얘기다.  
이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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